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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명물 먹자골목- 칠성시장 닭곱창거리

2017-07-28

‘치맥·곱창 도시’ 대구…전국 유일무이 ‘닭곱창볶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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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 돼지불고기, 닭도리탕, 동인동찜갈비, 돼지두루치기 등의 요리법과 맞물려 탄생한 대구의 명물음식인 닭곱창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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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식당의 3대 사장인 김윤주씨.

며칠 전 신선하게 다가온 별미 닭요리가 있었다. 칠성시장에서 40년간 한 자리를 지켜온 ‘진주식당’의 명물인 ‘닭곱창볶음’. 다른 도시에는 없다. 오직 칠성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다. 1946년에 시장공영화 정책에 따라 ‘북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칠성시장. 일제강점기 그 언저리엔 ‘도수원(刀水園)’이란 유원지형 요정이 있었다. 나중엔 매립된다. 현재 칠성시장, 경명시장, 대성시장, 칠성꽃시장, 대구청과시장, 삼성시장, 북문시장, 능금시장, 가구시장 등 9개 시장을 합쳐 칠성시장이라 한다. 시장 동쪽 끝에는 문짝골목, 서쪽 끝에는 전자상가와 중고 주방용품거리가 있다.

대구의 다양한 음식문화가 낳은 별미
70년대 전국 최강 닭시장 역사도 한몫

닭볶음탕 영향받아 닭곱창탕으로 탄생
안주 겸 반찬으로 인기…볶음 형태 정착
능금시장 맞은편 40년 전통 진주식당
바로 옆 거창·예천식당이 맛 역사 이어


◆ 70년대 최강 칠성시장 닭집들

닭곱창.

이걸 갖고 별미를 만든 아줌마들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대구니깐 가능한 스토리. 소와 돼지 막창·곱창이야 대구에선 상식, 하지만 타지에선 아직 낯설고 닭곱창은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들다.

닭곱창볶음은 대구의 다양한 음식문화와 맞물려 탄생한 것이다. 이 요리는 70년대 전국 최강이었던 시내 여러 재래시장 닭전골목에서 태어났다. 특히 칠성시장 닭거리에서 가장 영롱하게 피어난다. 칠성시장은 서문시장, 남문시장 등과 함께 대구의 대표적 닭시장이었다. 족발골목, 어물전과 맞물려 닭전골목이 형성된다.

칠성시장 닭곱창볶음의 리더격인 ‘진주식당’. 거기로 가기 전 닭 부산물을 파는 골목부터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닭 취급 업소는 의성, 성일, 칠성, 이화 등 10여 군데였다. 한창때는 30집 이상이 몰려있었다. 근처에 백숙용 한약재를 파는 곳도 있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닭을 향한 사람들의 입맛도 급변했다. 껍질을 꺼리는 사람이 있고 정육만 원하는 이가 있다. 다이어트를 위해 앞가슴살만 찾는 이도 있다. 예전엔 없던 흐름. 상인들도 그 수요를 좇을 수밖에 없다. 닭도리탕(볶음탕)용으로는 폐계(알 낳는 기능을 다한 늙은 산란계로 노란 빛깔이 돌아 일명 ‘노란닭(노계)’으로도 불린다), 2천원 정도 하는 삼계탕용 닭으로는 ‘백세미’로 불리는 영계, 졸깃한 원형의 우리 닭맛을 원하는 이는 토종닭, 별미 안주를 원하는 이는 염통·닭똥집(닭모이집)·닭곱창·닭발 등을 사간다.

70년대만 해도 가게마다 전용 닭장이 있었다. 주문이 밀리면 수시로 닭을 잡았다. 뜨거운 물에 담가 직접 털까지 뽑았다. 아내는 팔고 남편은 닭을 손질했다. 이젠 분업세상. 도계업자가 깨끗하게 장만해서 닭집에 갖다준다. 그땐 입맛이 세밀하지 못해 ‘부분육’이란 개념도 없었다. 그냥 통째로 팔렸다. 내장은 근처 닭곱창볶음 전문 주인들의 차지였다.

◆ 닭곱창거리를 찾아서

진주식당은 능금시장 맞은편에 있다. 바로 옆에도 같은 음식을 파는 ‘거창식당’과 ‘예천식당’이 있어 현재 이 시장에서 닭곱창볶음을 취급하는 곳은 3군데. 한창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만큼 먹거리가 다양해졌다. 소와 돼지를 제외한 가금류의 내장 유통이 엄격히 규제된 탓도 있다.

진주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33㎡(10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식당. 식탁은 딱 6개다. 식당이라기보다 분식점 같다. 돼지껍데기, 두루치기 등도 팔지만 대표 메뉴는 단연 닭곱창볶음. 1층도 모자라 천장방을 뚫어 옥탑방까지 증설해 놓았다. 개업 초기의 산물이다. 손님이 밀려들어서 할 수 없이 그 공간을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철제 계단 8개를 딛고 천장으로 올라섰다. 3개 정도의 식탁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다. 이제 그 공간을 사용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 시절 운동권 대학생들이 밀담을 주고받던 공간이기도 했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주인은 귀가도 못하고 거기서 잠을 청할 때가 많았다. 추억의 아날로그 TV가 아직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입구 왼쪽에 떡볶이집 같은 규모의 자그마한 요리 공간이 있다.

닭곱창볶음. 처음에는 ‘닭곱창탕’으로 불렸다. 안주 겸 반찬으로 인기가 좋은 덕분이다. 어떤 단골은 ‘탕’처럼, 어떤 이는 ‘찌개’처럼, 또 어떤 이는 ‘볶음’식으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내장맛이 스며든 양념은 밥을 비벼먹기에 딱이었다. 볶음을 할 때 물을 넉넉하게 부으면 찌개도 되고 탕도 된다. 워낙 한 손맛 하던 주인들이라서 가능했다. 한 음식이 순식간에 여러 형태로 변해서 ‘고무줄탕’이라고도 했다.

닭곱창탕. 이건 1970년대 무렵 앞산 안지랑계곡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매운 닭도리탕(볶음탕)의 영향을 받아서 태어난다. 60년대 폭발적 인기를 얻은 대구식 불고기는 닭도리탕과 동인동찜갈비 등에 영향을 준다. 이 흐름을 잘 파고든 게 닭곱창탕이다. 고기향과 화학조미료, 그리고 고추장과 설탕·고춧가루가 한몸이 되면서 더욱 중독성을 갖게 된다. 고춧가루와 마늘을 축으로 한 ‘대구탕(代狗湯·대구식 육개장)’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한다. 닭곱창탕은 나중엔 국물이 바짝 졸아들어 볶음톤으로 변한다.

그 시절 시장 아낙들은 다들 ‘사생결단’이었다. 법과 규칙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아 법보다 주먹, 설득보다는 욕이 더 앞섰다. 절벽에서 진일보하는 맘이 아니면 장터로 나오지 말아야 했다. 주인 오순일씨는 영주에서 청송으로 시집을 갔다. 77년쯤 5남매를 먹여살리기 위해 칠성시장으로 홀로 나왔다. 여러 메뉴를 살펴보다가 닭곱창에 승부수를 던졌다. 진주식당은 진주 출신 주인 권후분한테 가게를 인수받았다. 당시는 별다른 술안주가 없었다. 자연 소·돼지·닭의 부산물을 응용한 특미가 골목마다 흘러넘쳤다. 특히 대구는 타지에서는 손도 대지 않았던 내장 응용 요리가 특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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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곱창 외에 닭똥집, 염통, 알집 등도 볶음재료에 포함됐다.

◆ 달달했다가 이젠 매콤한 닭곱창

칠성시장의 닭집이 폭발적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전국 최대 규모의 부화장과 양계장이 대구 전역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60년대 중후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범어동 양계타운은 전국 최고였다. 그랜드호텔, 동도초등, 범어시장, 대구어린이회관까지 길게 형성된 구릉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양계장이 들어왔다. 가장 만만한 게 닭요리였다. 특히 요즘 같은 복철에는 너나없이 큼지막한 토종닭으로 백숙, 닭개장 등을 해먹는 게 대구만의 하절기 보양식 풍습이었다. 얼큰하고 화끈한 육개장 문화는 결국 백숙을 닭도리탕, 뒤에는 안동찜닭과 매칭된 대구식 찜닭으로 변용시켰다. 이런 저력은 80년대 삼계탕 신드롬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 한국 양념프라이드치킨 프랜차이즈의 선구자인 윤종계씨의 멕시칸치킨, 그리고 간장튀김닭의 선구인 대구통닭과 이를 토대로 다국적 프라이드치킨 시대를 연 교촌치킨 등이 2013년부터 대구를 ‘치맥시티’로 만든다.

엄청난 닭이 매일 칠성시장 닭전에서 거래됐다. 주인 오씨도 새벽같이 부산물을 갖고와 세척하고 1m 남짓한 곱창을 다듬어 먹기 좋게 10㎝ 정도 크기로 잘라 볶았다. 동절기와 하절기엔 콩나물국과 오이냉국을 곁들였다.

새로운 술안주의 등장, 맛에 반한 단골이 조석으로 몰려들었다. 진주를 비롯해 칠성, 북문, 경남 등 10여 곳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사용할 닭곱창만 전문으로 장만해 주는 이들까지 장터 한켠에 생겨난다.

단골층은 다양했다. 근처 2군사령부 장교, 휴가 나온 군인, 칠성카바레 춤꾼, 아파트 건설현장 막노동꾼 등이 어울렸다. 특히 장마철엔 막노동꾼의 출입이 부쩍 잦았다. 곧 프로야구 붐이 일어났다. 삼성이 이기는 날이면 광팬 단골들이 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경북대학생들에겐 닭곱창과 불로동 무침회가 양대 술안주였다.

일반 육계의 닭곱창은 너무 물러서 씹힘성이 전혀 없었다. 반드시 폐계 곱창이어야만 했다. 폐계 곱창은 육계에 비해 졸깃해 씹힘성이 좋았다.

1년에 딱 이틀, 설·추석만 쉬었다. 허리가 너무 아파 일을 더 할 수 없어 7년전 영어 강사 출신의 며느리 김윤주씨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 사이 맛이 조금 진화했다. 초창기엔 매운맛보다 단맛이 강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매운맛이 강세를 보인다. 주문을 하면 맵기를 강약으로 조절해준다.

이젠 닭곱창도 수난시대를 맞았다. 조류독감 등으로 인해 닭곱창 유통이 금지된 탓이다. 그래서 곱창의 끄트머리에 조금 붙은 ‘꼬타리’ 부위만 사용한다. 그 꼬타리에 염통, 알집, 닭똥집 등을 함께 섞어 볶는다. 처음 온 손님은 다들 알집을 가장 궁금해한다. 이 알집은 내장에 포도송이처럼 달려 있는 계란 직전의 일종의 유란이다.

닭곱창도 초창기와 다른 스타일로 변형됐다. 이젠 닭곱창이라기보다 ‘닭내장볶음’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단골은 닭내장이라고 하면 맛이 덜 날 것 같다면서 여전히 닭곱창이 좋단다. 입구 유리 문에 붙여져 있는 닭곱창이란 문구가 종일 군침을 흘리고 있다. 생각해 보니 닭곱창, 딱 ‘대구기질’이다.

40년 전에는 한 접시 1천원, 이젠 1만~2만원. 북구 칠성시장로 35-1. (053)427-1364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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