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8(금)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페루 이카(Ica)와 피스코(Pisco)

| 2017-08-11 08:19:08

‘사막의 롤러코스터’ 버기카…타는 순간 오감 짜릿

와카치나 사막의 버기카와 샌드 보딩.

와카치나 오아시스 마을.
펠리컨 무리.
나스카 문명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칸델라브로(Candelabro) 지상화.
페루 여행의 으뜸은 마추픽추이다. 하지만 페루에 마추픽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막과 해안을 끼고 있는 페루 남쪽 지역은 고산 지대 마추픽추와는 전혀 다른 풍경과 경험을 선사한다. 그 중심 도시는 팬아메리칸 하이웨이가 통과하는 이카이다. 1563년에 창건된 이 도시는 리마에서 300㎞ 정도 떨어져 있으며, 인구가 22만 명에 이른다. 이 지역은 건조한 사막기후로 포도를 많이 재배하여 ‘피스코’라는 무색의 포도 증류주로도 유명한데, 동명의 항구도시 피스코와 110㎞에 이르는 철도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에 좋다.

도로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버스를 타면 족히 5시간은 걸려야 도착한다. 대성당이나 식민시대의 거리 등이 있긴 하지만 다른 도시에 비하면 보잘것이 없다. 나도 ‘이카의 돌(Ica Stones)’ 이야기 때문에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도시이다. 1961년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 도시 이카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지반이 씻겨 내려간 자리에 고대의 신비로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돌무더기가 발견된 것이다. 66년에 한 농부가 이 돌을 근처에 살고 있는 자비에르 카브레라라는 의사에게 선물했다. 화산암의 일종인 이 돌에 새겨진 그림은 공룡, 사람이 공룡을 타고 있는 모습, 심장 수술을 비롯한 각종 수술 장면, 나스카 문양과 비슷한 형상들이었다. 이 그림을 근거로 그는 아주 먼 옛날에 지금과 같이 발달한 고대문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돌은 그의 이름을 따서 ‘카브레라 스톤’으로도 불린다. 그는 이 돌을 만 개 넘게 수집해 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 돌은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지만 이 도시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수도 리마로부터 300㎞ 떨어진 이카
이국적 풍광 와카치나 오아시스 마을
사막의 일몰·샌드보딩 체험 긴 여운

110㎞ 철도로 연결된 항구도시 피스코
‘리틀 갈라파고스’ 바예스타 선상투어
각종 희귀 새·거대 지상화 보는 재미


이런 이야기를 제외하면 이곳을 찾는 모든 이유는 와카치나에 있다. 이카에서 5㎞ 정도 떨어진 오아시스 마을 와카치나는 현지어로 ‘아름다운 여인’을 뜻한다. 이 이름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서 목욕을 즐기던 아름다운 공주가 훔쳐보던 사냥꾼을 피해 도망을 가면서 나풀거리던 옷은 모래 언덕이 되고 목욕물은 오아시스가 되었으며, 공주는 그 오아시스로 뛰어들어 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인어는 보이지 않지만 페루의 50솔 지폐 뒷장의 그림이 바로 와카치나의 초록색 호수다.

이카 여행의 참맛은 모래사막의 이국적인 풍경과 그곳에서의 체험에 있다. 특히 오아시스 마을에서의 하룻밤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야자나무에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은 원래 페루 상류층의 휴양지였으나 지금은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낮에는 샌드 보드를 타고 밤에는 파티를 즐기는 체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본격적인 와카치나 체험에 나섰다. 이곳의 대표적인 투어는 샌드 보딩을 포함한 버기카 투어이다. 이 투어의 황금 시간대는 오후이다. 사막의 일몰을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버기카는 모래 언덕을 달리기 위해 특별히 만든 차량으로, 지프차 형태에 커다란 바퀴를 단 오픈카이다. 버기카는 가파른 모래 언덕을 최고 속도로 질주한다. 오르내리는 경사가 족히 60도는 넘어 보이는 것이 앞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스릴 속에서 저절로 비명이 새어나오게 만든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는 안전장치가 있다는 믿음이라도 있는데, 사람이 운전하는 버기카는 스릴이 배가된다. 우리의 노련한 운전수는 우리를 언덕 꼭대기에 내려놓고서야 어깨를 으쓱하며, ‘어때, 재밌지’라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제 이 꼭대기에서 샌드 보딩을 할 차례이다. 내려다보니 아찔한 경사이다. 이런 모래 언덕에서 보드를 탄다니, 평지에서도 못 타본 보드를 어떻게 탈까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TV 광고에서처럼 보드 위에 서서 멋지게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보드에 엎드려 탄다는 말에 적이 안심을 한다. 보드 바닥에 왁스를 칠한 다음 보드에 엎드려 준비 자세를 잡으니 다시 아찔한 급경사에 숨이 턱 막힌다. 눈을 질끈 감고 출발을 했는데, 정신을 차리며 속도감을 느끼자마자 벌써 언덕 아래에 멈춘다. 출발 시의 긴장감과 도착 시의 성취감이 짧은 몇 초 사이에 교차하면서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투어가 끝나고 이제 나름의 방식으로 사막을 즐긴다. 난생처음 보는 모래사막의 풍경은 버기카와는 또 다른 전율로 다가온다. 파란 하늘과 하얀 모래 언덕이 맞닿은 지평선 구도는 그림인 양 비현실적이었다. 이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그 속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 맨발로 모래 언덕 속으로 들어간다. 모래 언덕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며 한 걸음 옮기면 반걸음은 뒤로 밀어낸다. 나의 소심함을 질책하듯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참 실랑이 끝에 작은 언덕 하나가 나를 받아준다. 그 언덕에 서니 야자수와 어우러진 오아시스 마을의 초록색 호수가 오롯이 담긴다. 한눈에 모두 담긴 오아시스 마을은 그림 그 자체이다.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한참을 그림 속에 빠져 있다가 거기에 닿을 듯 길어지는 내 그림자를 보고서야 문득 미몽에서 깨어났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하얀 모래 언덕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늘도 사막도 온통 붉은빛이다. 그리고 그 빛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 하나 둘 별을 만들었다.

별빛을 받으며 모래 언덕을 내려와 오아시스 근처 노천식당에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저녁을 즐겼다. 어둠이 내린 오아시스는 낮의 열기와는 또 다른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가벼운 차림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 손에 맥주병을 쥔 채 저마다의 언어로 신나게 수다를 떤다. 또 몇몇 팀은 기타 선율에 맞춰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세상의 일들을 저절로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자유로움이다.

전날의 짜릿함은 다음 날 새벽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사막의 일출도 꼭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맨발로 사막 산책을 나섰다.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모래 언덕 꼭대기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밤새 식어버린 모래는 상쾌한 감촉으로 발등을 간지럽힌다. 멀리서 붉은 기운이 퍼져오며 어제의 석양처럼 모래를 물들인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모래사막에서의 긴 하루를 보내고 피스코로 향한다. 피스코는 인구 6만 명이 되지 않는 소도시이지만 태평양 연안 피스코만에 면한 주요 항구이다. 피스코의 주요 관광지는 파라카스 해상공원의 바예스타 섬이다. 피스코 항으로 가는 도중 피스코 브랜디를 증류하는 포도농장에 들렀다. 제조과정을 견학한 후 여러 종류의 피스코를 시음해 보았다. 알코올 도수가 40도 넘는 피스코도 순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더운 여름에 어울리는 것은 피스코 샤워라는 칵테일이다. 계란 흰자와 라임 즙, 설탕 시럽 등을 얼음과 섞어 만드는 피스코 샤워는 페루는 물론 남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전주로 시원하고 상큼했다.

몇 잔의 시음으로 불그레해진 나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이 들었고, 어느새 피스코 해안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에서 바예스타 섬 선상투어를 했다. 바예스타 섬은 ‘리틀 갈라파고스’라고 불리는 해양 생태계의 보고이다. 이곳에서는 물개 종류인 오타리아와 각종 바닷새를 비롯하여 훔볼트 펭귄과 펠리컨 같은 멸종 위기의 희귀종들을 구경할 수 있다. 수많은 바닷새와 물개들로 뒤덮인 장관을 연출하는 이 섬들은 한때 관광지라기보다 산업현장이었다. 바닷새의 배설물이 퇴적된 구아노가 바로 인산 비료의 원료인데, 이 섬들이 주 채취 장소였고, 지금도 그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선상 투어의 또 다른 볼거리는 칸델라브로라는 거대한 지상화(地上畵)이다. 이 그림은 길이가 189m에 폭이 70m나 되는 촛대 모양인데, 나스카 지상화와 마찬가지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그렸는지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귀항 길에서는 또 펠리컨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펠리컨의 멸종과 관련된 극비문서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영화 ‘펠리칸 브리프’를 통해 알게 된 이 녀석을 실물로는 처음 본 것이다. 긴 부리에 큰 덩치가 영 엉성해 보이는 것이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사막, 오아시스, 버기카, 샌드 보딩, 피스코, 바닷새, 물개, 지상화, 그리고 펠리컨.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이 이 지역 여행의 묘미이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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