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목)

소수 의사도 존중받는 21세기版 ‘아고라 광장’ 만든다

| 2018-10-11 07:23:32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을 뛰어넘는 거대한 기술’ ‘정보의 바다를 가치의 바다로 바꾸는 신기술’ ‘기존의 패러다임과 질서를 뒤바꾸는 또 다른 산업혁명’. 블록체인이 미래에 미칠 영향력을 묘사한 글이다. 지난 2월 세계경제포럼은 전세계 은행의 80%가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또 블록체인 기술이 2025년에는 전세계 총생산의 10%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특히 ‘유엔 미래보고서 2050’은 블록체인을 10대 유망 기술로 선정했다. 정치권도 블록체인에 주목한다. 블록체인을 활용해 수평적이고, 누구나 발언할 수 있으며 소수 의사도 존중받은 고대 그리스 아고라 광장을 재현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블록체인의 개념과 블록체인이 가져올 정치 혁명을 정리해 봤다.

거래정보 보관을 중앙서버 대신
모든 참여자 컴퓨터에 분산 저장
정보 공유·참여 보장 ‘脫중앙화’

“수평적이고 누구든지 발언 가능”
美·獨 등 사전투표·탄원에 도입
투표·댓글 조작 봉쇄로 신뢰 회복
韓, 정당코인·당원 참여 등 고심


◆블록체인이란

블록체인 기술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철수와 영희의 학교에는 총 1천명의 학생이 있고 각 학생들은 화폐를 5개씩 갖고 있다고 가정하자.

기존 은행의 방식에서는 선생님과 같이 신뢰할 수 있는 관리자가 전체 코인의 개수와 학생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코인의 개수를 관리한다. 만약 철수가 영희에게 2개의 코인을 빌려준다면 이 거래는 선생님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철수가 선생님의 장부를 몰래 조작해 영희에게 더 많은 코인을 빌려줬다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거래 내역을 선생님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자신이 좋아하는 학생에게 더 많은 코인을 주려고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보유한 코인 개수를 조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면 선생님의 역할은 사라진다. 블록체인 방식에서는 모든 학생이 코인 거래가 기록되는 장부를 가지기 때문이다.

앞서 철수가 영희에게 2개의 코인을 빌려줄 경우 해당 거래는 모든 학생에게 퍼뜨려지고 학생들은 그 거래를 자신의 장부에 기록하게 된다. 철수가 영희에게 5개의 코인을 빌려준 것처럼 자신과 영희의 장부를 수정하더라도 블록체인 시스템에선 나머지 998명의 장부를 확인하기 때문에 철수의 정보 조작은 금세 탄로 나게 된다.

블록체인은 다수결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가장 많이 저장된 정보를 올바른 것으로 간주한다. 만약 철수가 영희에게 더 많은 코인을 빌려줬다고 주장하려면 최소 501개의 장부를 조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블록체인에선 전체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조작이 더 어려워진다.

이처럼 블록(장부)은 이전 블록에 대한 연결고리와 거래 정보를 담고 있는 상자다. 새롭게 만들어진 블록은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블록들에 추가로 연결된다. 이때 위조 방지를 위해 새 블록에는 이전 블록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것처럼 저장한다.

블록체인의 높은 보안성은 ‘레고’를 연상하면 된다. 레고를 쌓을때 이미 가운데에 들어간 레고블록을 다른 색 레고블록으로 바꾸려면 교체하려는 레고블록의 윗부분을 들어낸 뒤 원하는 색깔의 블록으로 바꿔야 한다.

블록체인에서 정보 조작이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90개의 블록이 체인으로 연결돼 있을 때 70번째 블록 정보를 조작하려면 71~90번 블록의 정보를 모두 수정해야 70번째 블록 정보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위조는 불가능에 가깝다.

다이아몬드 유통회사 ‘에버레저’는 이같은 블록체인의 특성을 다이아몬드 이력 보증에 적용했다. 기존 다이아몬드 유통은 진품 확인 증명서와 원산지 증명서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위·변조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추적이 용이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에버레저는 이력 보증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거래할 때 보증이 조작될 수 있다는 소비자의 걱정을 해소했다. 에버레저는 불과 2년 만에 100만개 이상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블록체인 플랫폼을 구축했다.

블록체인이 가져 올 혁신은 ‘탈(脫)중앙화’와 ‘공유’로 요약된다.

기존에는 모든 거래의 장부를 중앙기관이 관리하는 방식이었지만, 블록체인 방식에선 따로 중앙에서 거래를 검증하고 관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중앙기관이 없어지고 개인 간의 거래가 이뤄지면 이를 모든 참여자들이 함께 검증하고 보유하게 된다.

이 거래 내역은 중앙서버가 아닌 참여자들의 컴퓨터에 각각 저장되고, 참여자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된다. 당연히 정보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다.

◆블록체인이 가져올 정치계 혁신은

블록체인은 정치계에도 적지않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우선 블록체인은 전자투표에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기술이다. 투표는 투명성과 보안이 생명인 행위이기 때문에 결과가 조작되면 절대 안된다.

미국의 경우 전자투표를 놓고 불신의 목소리가 팽배했다. 2016년 대선 때도 투표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중앙정부에서 투표시스템을 관리·통제하기 때문에 투표 결과를 위·변조할 수 있다는 의심을 샀다. 또 미국은 이 선거에서 전세계에서 보낸 부재자 투표 30만여표가 법정시한 내 도착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해 참정권 침해 논란도 있었다.

블록체인을 전자투표나 모바일투표에 활용하면 투명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보안성과 신속성도 높아지는 투·개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개인이 직접 본인 컴퓨터에서 후보자를 선택해 투표하면 블록이 형성돼 체인으로 연결되고, 철수와 영희의 학교 사례처럼 모든 투표 정보는 한 곳에만 저장되지 않고 투표에 참여한 국민의 모든 기기에 저장되기 때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은 사라진다. 당연히 자신의 투표 결과만 확인이 가능하고, 다른 사람의 투표 결과는 익명으로 공유된다.

블록체인 투표는 투표자가 개표를 포함한 투표의 전 과정을 직접 감시·검증할 수 있어, 기존 투표시스템의 불신을 깨끗하게 해소한다. 그야말로 공정선거가 가능해진다.

스페인과 에스토니아, 미국, 독일 등은 이미 블록체인을 통해 예비선거, 온라인 탄원, 정당의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2015년 1월에 창당한 스페인의 정당 포데모스는 ‘아고라 보팅’이라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집행부 26명을 선출했다. 또 당내 의사결정이나 당의 방향성 제시도 블록체인을 이용한 투표로 결정한다. 특히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루미오’ 앱을 통해 시민과 당원들이 정책을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덕분에 포데모스 당은 현재 인민당에 이어 둘째로 당원 수가 많다.

2016년 3월 만들어진 호주의 플럭스당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전자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에스토니아 의회 선거, 덴마크의 정당 내부 투표, 미국 대선후보 선정 등 여러 국가에서 블록체인을 투표에 적용하고 있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정부도 지난 5월 치러진 예비선거에서 미국 공식 선거 사상 처음으로 블록체인을 활용해 부재자 모바일 투표를 실시했다. 웨스트버지니아주는 11월 본선거에서 모든 카운티에 블록체인 투표를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 폴리시브릿지 이현승 대표는 “조작이 불가능한 ‘블록체인 투표’는 투표에 대한 유권자의 신뢰를 높인다. 또 최근 ‘드루킹’ 사건으로 이슈가 된 댓글 조작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도 블록체인 모바일투표 도입을 고심 중이다. 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정당개혁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나경원 의원이 제안했다.

나 의원은 영남일보 인터뷰에서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다음 전당대회 지도부 선출에 블록체인 투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며 “블록체인의 탈(脫)중앙화, 신뢰성은 당원 모집은 물론 정당 문화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블록체인을 활용한 정당코인을 도입해 후원금과 함께 당원의 정치 참여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가령 당원들이 투표 참여나 게시글 작성, 정책 제안 등의 활동을 하면 블록체인 시스템이 이를 기록하고, 활동에 대한 포인트를 지급해 정당 내에서 화폐를 쓰듯이 유통하겠다는 게 나 의원의 생각이다.

전문가들은 블록체인 기술을 정당에 도입할 때 목적을 구체적으로 잡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원 조희정 책임연구원은 “블록체인 이전에도 IT(정보기술)를 정치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있었다”며 “유행을 따라가기보다는 당원 확대를 목표로 할 것인지, 정치 후원금 확대를 목적으로 할 것인지를 명확히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승 대표 역시 “블록체인의 속성이 분권적·수평적이지만 유권자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블록체인을 정치 시스템에 어떻게 접목할지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상현기자 sh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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