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3(토)

[3040칼럼] 생명과 안전, 제도와 문화 병행돼야

| 2019-02-12 08:17:20

편지칼과 가위는 서랍 보관

응급실은 급한 순서로 치료

美사회, 안전·생명존중 기본

국내 의료인 안타까운 죽음

되풀이 안되게 새 문화 필요

강선우 대통령직속자문기구 국가교육회의 전문위원

인류학자 칼베로 오베르그가 1954년에 처음 소개한 ‘문화충격(文化衝擊, culture shock)’은 익숙지 않은 문화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로서 개인이 표준(혹은 정상)이라 여기던 사회적 시각이 파괴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문화충격의 경험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함 등의 스트레스를 불가피하게 동반하는 역기능이 있긴 하지만, 우리의 사고를 보다 유연하게 해 줌으로써 인간과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 넓이와 깊이, 때론 여유를 더해 주기도 한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처음 조교 일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당시 딸아이 일로 병원 응급실을 몇 차례 찾았을 때 느꼈던 문화충격은 여전히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다.

대여섯 시간에 걸친 조교 오리엔테이션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선배 조교가 가장 중요한 교육이 남았다며 편지칼(letter opener)과 가위를 서랍에서 꺼내 보여줬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 등을 이유로 격앙된 학생들이 조교실로 찾아올 때는 항상 문을 열어 놓을 것, 조교가 출입문 가까운 쪽에 앉을 것, 그리고 편지칼이나 가위 등은 책상 위 연필꽂이가 아닌 책상서랍에 넣어둘 것을 당부했다. 교수로 임용되고 난 이후에도 총기를 소지한 사람이 건물에 잠입했을 때의 대비 매뉴얼을 포함해 비슷한 종류의 안전 교육을 매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딸아이가 큰 외과 수술을 받은 후 수술부위에 심각한 감염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응급실 진료부터 수술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큰일 났을 것이란 말로 의사는 8시간의 수술이 잘 마무리됐단 소식을 대신했다. 그런데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몇몇 환자들이 침상에서 치료를 받지 않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게 생각났다. 그들 중 누구도 본인이 먼저 왔다고 소리치거나, 빨리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조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의 우문(愚問)에 ‘더 급한’ 사람이 먼저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간호사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이 두 가지 문화충격을 관통하는 궤가 있다면, 미국 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명 존중과 안전 문화가 아닐까. 강자인 교수의 안전도 약자인 학생의 안전만큼이나 보호 받아 마땅한 것이고, 의사의 안녕도 환자의 안녕과 같은 무게이며, 나의 치료도 급하지만 생명이 먼저인 인식과 문화.

20여 년간 정신질환자를 돌보며, 2011년 개발된 한국형 표준자살 예방 교육프로그램 ‘보고 듣고 말하기’를 마련하고, 2016년에는 자신의 우울증 극복기를 담은 책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통해 환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던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 임 교수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은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 사회는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란 또 다른 영웅을 잃었다.

응급환자 전용 헬기(닥터헬기), 권역외상센터 도입, 재난응급의료상황실 운영, 국가응급진료정보망 구축, 응급의료이송정보망 사업 추진, 응급구조사 관련 불합리한 규정 개정. 윤 센터장이 어깨 위에 짊어진 채 25년간 묵묵히 버텨왔을 무게.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은 기고문을 통해 “윤한덕의 ‘고통’을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았다”며 그를 ‘아틀라스’에 비유했다. 환자의 생명과 안전만을 생각하다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한 임세원 교수와 윤한덕 센터장의 순직은 척박한 의료인의 안전이나 열악한 응급의료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구축해 가야 할 의료체계의 전면적 개선, 인력 양성, 응급의료 적정 수가, 응급의료 저해 규제 개선 등으로 반드시 응답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제도 마련은 첫 걸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명과 안전을 존중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산소처럼 자리잡지 않으면, 어렵게 마련된 제도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고 임세원 교수와 고 윤한덕 센터장의 희생은 정부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과제이자 책임이다.
강선우 대통령직속자문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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