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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3] 보광사 극락전과 만세루

2019-07-23

조선 500년 相臣 15명·왕비 3명 배출한 청송심씨 가문의 願刹

20190723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건립된 보광사 극락전. 조선 중기 건축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고, 17세기 불전 건축의 수법과 공통점이 많아 2014년 12월 보물 제1840호로 지정됐다.

원당(願堂)은 마음에 품은 집, 희망하고 기원하는 집이다. 문화사에서 그것은 불교와 효사상이 결합된 것으로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던 법당(法堂)을 말하며 원당의 기능을 하는 사찰을 원당사찰, 또는 원찰(願刹)이라 하였다. 그것은 산 자의 간절함으로부터 태어난 정리(情理)였고, 사찰이라는 불국토안에 세운 지극히 인간적인 공간이었다.

20190723
만세루 현판

불교와 유교 효사상 결합된 상생공간
사찰 인근 보광산에 시조 심홍부 묘소
세종때 추모재·만세루 짓고 제사 올려

극락전 광해군 7년 건립 상량문 발견
나무로 만든 당초문양 ‘현어’매우 희귀


20190723
극락전 남쪽에 위치한 만세루. 청송심씨 후손들은 궂은 날씨로 묘 앞에서 봉향이 어려울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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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을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고주에 기대어 불단을 설치한 극락전 내부 모습.


#1. 청송심씨와 보광사

청송심씨(靑松沈氏)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문신 심홍부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왜구토벌의 공훈을 세우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운 심덕부가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을 거쳐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봉해진 뒤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5백년의 시간 동안 청송심씨 집안은 그야말로 쟁쟁한 권세를 누렸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상신(相臣)이 15명, 대제학이 2명, 부마가 4명, 소헌왕후(昭憲王后), 인순왕후(仁順王后), 단의왕후(端懿王后) 등 3명의 왕비를 배출시키며 조선 정계를 주름잡았다.

심씨 가문의 첫 왕비는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로 조선 초 이조판서를 지낸 심온(沈溫)의 장녀였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자리가 위태로웠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인자하고 어진 세종의 비로 만인의 표상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금슬이 좋았다. 그녀는 8남2녀를 낳아 이후 왕의 어머니, 왕의 할머니가 되었다. 세종은 재위 초 전국의 36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을 폐지하라고 명한 바 있다. 그로 인해 조선 불교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재위 중반에 들어 세종은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단적인 예로 소헌왕후가 1446년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왕비의 명복을 빌었고, 수양대군은 양평 용문사를 어머니를 위한 원찰로 삼고 크게 창했다.

불교가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나라의 원찰들은 왕실과 귀족계층의 비호와 지원 아래 상당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성리학적 이념이 자리 잡은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찰의 건립 자체가 금지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 원찰은 왕실에 의해서만 건립, 운영되었고 원찰이란 용어 역시 왕실의 후원을 받는 사찰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묘소가 청송읍 보광산의 정상부근에 자리해 있다. 가파른 산줄기가 급히 흘러내리다 작은 평지를 이룬 곳으로 등잔대의 호롱불 같은 자리다. 묘소를 바라보는 산자락 계곡 가에 절집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보광사는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보광사는 관아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심홍부의 무덤을 수호하는 사찰’이라 하여 청송심씨의 원찰임을 밝히고 있다. 보광사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왕실과의 관계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2. 보물 제1840호, 보광사 극락전

보광사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 문무왕 연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세종 때 왕비의 조상 묘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설도 있다. 약간 다르게는 대대로 청송심씨 집안의 원찰이었던 보광사를 세종 10년인 1428년에 청송군수 하담(河澹)에게 명하여 중수하고 재실인 추모재(追慕齋)와 묘재각(墓齋閣)인 만세루(萬歲樓)를 건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본전인 극락전(極樂殿)의 건립 연도다. 1980년경 보수공사 중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극락전은 만력(萬曆) 43년, 즉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건립되었다. 현재 보광사는 은해사(銀海寺)의 말사로 극락전과 만세루, 추모재 현판을 단 요사채, 그리고 근래에 지은 산신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광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사진 땅의 형세를 따라 전면이 높은 기단을 쌓고 둥근 화강석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은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이다. 공포는 건물의 규모에 비해 매우 화려하다. 지붕의 전면은 겹처마, 배면은 홑처마로 구성했고 맞배지붕의 측면에는 풍판(風板)을 내렸는데 약간 짧게 수평으로 끊어 가벼운 느낌을 준다. 특이한 것은 측면의 박공부에 설치된 현어(懸魚)다. 현어는 맞배지붕의 측면 박공판의 합각부분에 달아놓는 장식물을 말한다. 조선 중, 후기 앞뒤 박공이 만나는 부분은 지네철이나 꺽쇠로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보광사 극락전에는 나무로 만든 당초문양의 현어가 달려 있다. 이는 매우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내부는 후면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대들보를 올렸다.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고주에 기대어 불단을 설치했다. 전면의 좌우에는 띠살 무늬의 양여닫이문을 달았고 가운데에는 띠살무늬 가운데 팔각형의 교살창을 혼합한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 주택의 창살을 연상케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규모는 작으나 전형적인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기존에 보물로 지정·보존하고 있던 17세기 불전 건축의 수법과 공통점이 많아 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보광사 극락전은 2014년 12월17일 보물 제1840호로 지정되었다.

#3. 청송심씨 시조 묘재각, 만세루

극락전의 남쪽에 만세루가 서 있다. 묘소 앞에서 지내는 제사의 법도는 원래 종가의 의례였다. 향사를 받드는 날 비바람이 불어 묘 앞에서 봉향이 어려울 때 심씨 후손들은 만세루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만세루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따로 기록된 것이 없지만, 용전천 앞 청송군 관아지에 위치한 찬경루(讚慶樓,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와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때가 세종 10년인 1428년이다. 찬경이란 ‘소헌왕후를 배출한 경사를 우러러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용전천 물이 넘쳐 아예 보광산을 찾을 수 없을 때 제사를 지냈던 재각이다. 만세루는 철종 7년인 1856년에 청송심씨 자손들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958년에 중수하여 22세손인 심상각(沈相恪)이 상량문을 지어 걸었다. 그 뒤 1968년 찬경루를 고쳐 세울 때도 함께 손보았다. 2012년에는 청송심씨 측과 합의하에 퇴락한 추모재를 헐고 새로운 요사채를 지어 추모재 현판을 걸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보광사와 청송심씨 문중과의 밀접한 관계는 부인할 수 없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누각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주심포계의 단청을 올렸다. 누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4면에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극락전 방향인 북쪽 오른쪽에 4단의 목조 계단을 놓았다. 만세루 아래에는 유연정(油然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등잔대의 호롱불 같은 시조묘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 역할을 하는 우물인 동시에 예부터 지금까지 시조의 덕을 추모하는 상징에서 그렇게 불린다. 만세루는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유형문화재 제509호로 승격됐다.

청송 보광사는 근래 유교와 불교의 상생공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숭유억불’은 유교와 불교의 명암을 표현했던 말이다. 그러나 학계에 따르면 ‘숭유억불’이라는 말은 ‘실제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20세기 이후 일본 학자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말’이라 한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불교시설은 물론 국가적 불교 행사까지 모두 폐지되었지만 왕실 원당만은 조선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다. 원당은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의 심성을 담은 공간이며 왕실의 간절한 소원을 발원하는 곳이었다. 보광사 극락전과 만세루는 모두 청송심씨 시조묘를 향해 서 있다. 시조묘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와 잣나무는 세종의 비 소헌왕후와 13대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효심에 의한 것이라 전한다.
공동기획지원:청송군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청송군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경북도, 1984. 한국불교사찰전서, 불교시대사, 1996. 청송보광사극락전 국가지정문화재승격신청보고서, 청송군, 2014.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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