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4(수)

[월요칼럼] 여론은 대체로 옳다

| 2019-06-17 08:45:15

박규완 논설위원

조선시대 고위공직에 오르는 길은 첫째는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산림(山林)의 길을 택하여 몇십 년씩 학문을 닦으며 학파의 영수(領袖)가 되고, 그 학파가 정파로 바뀌면서 붕당(朋黨)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다. 산림은 조선시대 민간에서 학문적 권위와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한 인물을 말한다. 산림은 학계와 정계를 넘나들며 국정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왕으로부터 세도를 위임받아 정치판의 얼개를 짰다. 산림은 사림(士林)의 여론인 청의(淸議)를 공론화해 붕당정치를 이끌어갔다. 즉 산림의 권력은 사림의 여론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정치주도 세력이 여론을 형성했으니 백성들의 공론, 이른바 세론(世論)은 뭉개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바야흐로 세론정치 시대가 도래했다. 여론과 권력의 중심축이 국민에게로 옮겨간 까닭이다. 미디어의 다양화와 민주주의 착근이 결정적 동인(動因)이었다. ‘사기(史記)’ 화식열전편엔 “제일 잘하는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따라가는 정치, 그다음이 국민을 이익으로 이끄는 정치, 최악의 정치는 국민과 다투는 정치”라는 대목이 나온다. 사마천은 2천년 전에 이미 여론정치의 중요성을 간파했던 거다. 계륵이 돼버린 4대강 보(洑)도 여론과 환경영향평가를 외면한 결과물 아닌가.

한데 아직도 위정자들은 애써 여론이나 공론화를 기피한다. 이럴 땐 십중팔구 여론의 향배가 입맛에 맞지 않는 경우다. 대구시의 통합대구공항 이전이 딱 그렇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지난해 지방선거 때 통합공항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선거에서 승리했으니 공론화를 거친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논리적 비약이자 견강부회다. 그런 논리라면 문재인 대통령의 최저임금 1만원 공약에도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한다. 자영업자들이 망하거나 말거나.

권 시장의 통합대구공항 일편단심에 딴죽을 걸 의도는 없다. 다만 통합공항 건설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시나리오는 가덕도 신공항과 통합대구공항 병행 추진이다. 필자의 촉으론 청와대·정부·여당이 이미 병행 추진의 복선(伏線)을 깔았다고 판단한다. 통합공항 이전 일정을 질질 끌기만 하던 국방부가 갑자기 순순해진 것도 석연찮다. 연말까지 이전 부지를 확정하겠다는 로드맵을 밝혔고 다소 부풀려진 K2 후적지 가치 산정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총선의 전략적 요충지 부산경남 민심이 이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은 더 다급하다. 가덕도 신공항은 PK 민심을 다잡을 매력적인 카드다. 정치공학적으로 영양가 없는 대구경북을 의식해 가덕도 카드를 접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덕도 신공항은 알려진 대로 국가 제2관문공항이란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3천800m 활주로 건설, 유럽·미주 등 중장거리 노선 취항, 24시간 운항이 기본이다. 군위나 의성에 자리 잡을, 커퓨 타임(야간운항 통제시간)이 적용되는 군사겸용 공항이 넘볼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심공항의 프리미엄이라도 붙잡는 게 현명하다. 대구시가 한사코 통합대구공항을 밀어붙일 요량이라면 가덕도 신공항만은 결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서구인들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땐 ‘플랜 B’를 마련한다. 한데 통합대구공항 이전엔 플랜 B가 없다.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 사업비를 온전히 충당하지 못할 때, 통합공항 연결 교통망 구축을 위한 국비 확보가 무산될 때,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현실화될 때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엔 조정이 잘못된 정책을 펼치면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다. 여론조사와 공론화는 현대판 만인소라 할 만하다. 만인소는 표면상으론 간청이지만 속된 말로 ‘오야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견제가 숨어있다. 현대시민은 고등교육으로 무장하고 SNS로 정보를 공유하는 포노 사피언스(Phono Sapiens)다. 더 이상 중우(衆愚)가 아니다. 갈등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공항 문제는 종국엔 시민의 의중대로 귀결될 것이다. 왜냐고? 정치권력은 민의를 이기지 못하니까. 그리고 여론은 대체로 옳으니까.
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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