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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출향인사를 찾아서] 주태석 홍익대 회화과 교수

2006-02-06

일상의 美 재창조 '극사실주의' 회화 거목
타고난 재능·열정 "그림은 내 운명"
'기찻길' '나무' 등 작품 미술계 큰 반향
"대구는 현대미술 메카…옛 명성 되찾아야"
◆ 주태석의 작품세계
추상미술 대항 구상미술 추구 현실세계 있는 그대로 묘사

[출향인사를 찾아서] 주태석 홍익대 회화과 교수

주태석이 구사하고 있는 '구상미술(具象美術·figurative art)'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여 눈에 보이는 여러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미술로 추상미술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이 용어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한때 추상미술이 세계를 풍미했을 때 그에 대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따라서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는 대단히 넓다. 특히 '구상'이라는 말을 쓰고 자연주의라고 하지 않는 것은 다 같은 대상을 묘사하면서도 재현적·모사적인 경향이 강한 자연주의와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아카데미즘은 물론이고 매우 공식적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속하는 것은 보통 이 범주에 넣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가장 널리 일반대중의 취향에 적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주태석은 홍익대 미술대(1978) 및 동 대학원(1980)을 졸업했고, 국내와 일본에서 26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한국 드로잉 대전(1981, 부르클린 미술관), 한·일 현대회화제(1982·90, 후쿠오카 시립미술관·후쿠오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인도 트리엔날레(1985, 뉴델리), 現·像전(1986), 아시아 현대미술제(1986, 도쿄 도립미술관), 한국현대작가전(1989, S.B.A.C 센터, 파리), 카뉴 국제회화제(1992), 한국현대미술전(유럽 13개국, 1998) 등 국내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호암미술관·홍익대 박물관·국회의사당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70년대 이후 꾸준한 명맥을 이어왔던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는 대중적 인기와 성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상주의에 반한다는 이유로 주류에선 항상 비켜나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야 조명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자생적이기보다는 그동안 확보한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 수용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논리의 확립과 주체적 수용을 위해 끝없이 고심해온 작가들의 노력과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태석(53)이 있었다.

일찍부터 정밀한 사실주의 묘사를 '기찻길'이라는 소재를 통해 국내 극사실주의의 한 전형을 구축하고 있었던 그는, 특히 경험주의에 입각한 리얼리즘 회화의 기계적 재현이라는 맹목성에서 벗어나고자 한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의 회화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장미꽃처럼 향기롭다. 바탕에는 윤기가 흐르고 또한 친화력을 가지게 만든다. 얼룩묻은 길거리를 비집고 삐져나와 뽀얀 가로등의 불빛과 만나는 그 순간처럼 시각적인 환기력을 그의 작품은 듬뿍 향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미술평론가 서성록)


#대구 학창시절부터 드러난 천재성

54년 대구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주태석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중학교 시절, 교내 미술실기대회 1등은 항상 그의 차지였고, 2학년 들어서는 전국에서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이 났다. 한 번은 그가 다니던 미술학원장이 그의 범상치 않은 능력에 감탄하며 "학원비는 안받을 테니 원생들의 그림을 봐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3학년 때까지 미술학원 강사생활을 했던 그는 학업성적 또한 상위권을 유지했다. 주태석이 연예인 못지 않은 학교의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고, 이를 방증하듯 매일 교문 앞에는 그의 사인을 받으려는 여학생들로 넘쳐났다. 당시 미술을 가르쳤던 김응곤씨(현 대구대 명예교수)는 "태석이는 무조건 미술을 시켜야 한다"고 그의 부모님을 설득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의사나 판사가 되길 원했던 부모님은 단지 취미생활로서만 미술을 허락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의 그림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덩달아 자신감도 충만됐다. 2학년 때는 영남일보 주최 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인 국회의장상을 수상했고, 비슷한 시기에 한양대에서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총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미술도 야구특기생처럼 전국서열이 매겨지던 때라, 주태석은 수상경력만을 보더라도 전국 서열 1위였다.

미술은 이제 그의 삶의 전부이자 존재이유였다. 결국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74년에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자신 만큼 그림을 잘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첫발을 내디딘 주태석은 그러나 동기생들의 뛰어난 미술실력을 보고는 우쭐했던 자신의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이런 환경은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채찍질이 되었다. 한동안 그림에만 전념했던 주태석은 이내 독특한 '아우라(Aura·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로 동기생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개방적인 성격은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인간적인 면에서도 신뢰를 받았다. '군계일학'은 마치 주태석을 두고 한 말 같았다.

그가 대학생활 동안 과대표와 미대 학생장 등을 도맡아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그의 이런 외적인 활동은 그림을 등한시하게 만들었고 "장차 내가 미술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자신감의 상실도 가져왔다. 결국 주태석은 자신과의 약속을 결심하게 된다. 대학미전에서 특선을 수상하지 못하면 미술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겨울 방학 내내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며 그림작업에 몰두했다.

드디어 발표날, 주태석은 당당히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대세를 거스르는 그의 도전

주태석이 미술을 공부하던 당시 추상미술은 대세였다. 이에 반해 실체 있는 대상을 그리는 것을 즐겨했던 그의 작업은 그래서 늘상 외로움과 편견이 수반됐다. 하지만 그가 극사실주의에 기초한 '기찻길'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자 미술계는 주태석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27세의 늦깎이 군입대를 앞둔 시기. 공교롭게도 미국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하이퍼리얼리즘이 국내에 처음 도입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날개를 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안타까웠는데 운좋게도 육군본부에 미술특기생으로 차출되면서 미술작업은 이어갈 수 있었다.

군 시절 대부분을 그림을 그렸다는 기억밖에 없다는 그는 군생활 틈틈이 전시회 준비를 할 정도로 왕성한 창작의욕을 불태웠다. 항상 오전 3시면 일어나 그림을 그렸고, 제1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청년작가전에도 작품을 출품하는 등 열정을 바쳤다.

그는 언제나 주변에 있는 것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특히 80년대까지 이어온 그의 기찻길 연작은 평범하면서도 우리 화단에서의 극사실적 화풍의 한 전형으로까지 부상했다.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우연적인 장면을 포착해 그려낸 것으로 작가의 정감이나 주관적 정서를 내비치려는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주목됐으며 문명 비판적인 성격도 지녔다.

기찻길 이후에는 근 10년 간을 '나무'에 집중하며 사실주의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는 기찻길과는 달리 그가 자연에 눈을 돌렸다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스프레이를 사용해 자연의 단면을 극대화시켰고, 빛과 그림자를 개성있게 형상화시켰다.

이런 그의 작업은 국내는 물론 외국 평단의 호기심과 감탄을 자아냈다. 파리 개인전에선, 자연의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참신하다" "감성을 자극하는 새로운 사실주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자연'의 모습과 이를 포착해서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은 자연을 아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갖게 합니다. 묘사를 하면 할수록 멀어지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아득해지는 자연의 실체이죠. 자연의 한 단면의 묘사가 아닌 자연의 느낌을 포괄적인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려는 내 노력은 결국 아주 부자연스러운 요식행위를 강조하는 셈이죠."


#대구서 잇단 전시회 고향사랑 실천

그의 첫 개인전은 82년 대구 수화랑에서였다. 이후 신라 갤러리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가질 정도로 대구사랑을 몸소 실천했지만, 미술을 포함한 문화예술분야의 서울 중심의 정책과 지원은 지방에서의 창작 활동에 벽을 만들었다.

그는 "70~80년대 만해도 대구화단은 현대미술의 메카였다"며 "능력있는 화가들이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온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했다. 정책적인 지원이 바탕이 되고 일반인들의 관심이 뒷받침된다면 옛 명성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2005년 대구 두산갤러리에서 김구림·이두식·김일해 등과 출향 4인전을 연 것도 이런 바람을 반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림의 정의를 물었다.

"그림은 나의 체질입니다. 그러나 그 체질을 찾고 그 체질에 맞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아요. 나 또한 자신을 찾기보다는 주위에 너무 민감해 쉽사리 '자기 찾기'를 잊어버리고 너무 형식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소재나 주제가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대상을 어떠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표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는 3월 서울 인사동에서 열릴 기획전과 가을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출향인사를 찾아서] 주태석 홍익대 회화과 교수
지난해 중국 베이징 현대미술관을 찾은 주태석 교수.
[출향인사를 찾아서] 주태석 홍익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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