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070426.010110754220001

영남일보TV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6] 사로국

2007-04-26

진한 12國 정복…훗날 '신라 건국의 모태'
제련기술 바탕 군사력 강화 … 농업기술 발전 강성대국 자리잡아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6] 사로국
사적 제172호로 봉분 높이가 10m, 지름은 20m인 신라오릉. 사로국의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분묘라 전해진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사로육촌의 촌장들이 알천(경주 남산 기슭) 언덕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지금 백성들은 제멋대로 행동해 질서가 잡히지 않으니 임금이 필요하오"라며 양산촌장이 말문을 열었다. 이에 다른 촌장들도 "임금님을 모시고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마음이 어질고 덕과 용기를 갖춘 임금이어야 하는데 그런 인물을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라며 고민을 늘어놓았다.

이때 양산쪽에서 광채가 빛나자 촌장들이 그곳으로 뛰어갔다. 양산촌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오색 광채가 뻗치고, 흰 말 한마리가 우물에 절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자줏빛 알 하나가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깨어 보니 단정하고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동천 냇가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다. 하늘과 땅도 흔들리고 햇빛과 달빛이 더욱 밝아졌다. 사로육촌장은 아이가 하늘이 내려주신 임금님이라 믿고, 이름을 혁거세라 지었다.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 우물가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 아기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사람들이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떨어졌다. 이후 백성들은 이 시냇물을 발천이라 불렀다.

족장들은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키웠다. 사내아이는 태어난 알의 모양이 박과 같다고 해 성을 박씨라 짓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지었다.

13세가 되던 해 여섯 마을 족장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고, 알영을 왕비로 삼아 사로국을 세우니 이때가 기원전 57년이다.

◇승자의 왕국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그동안 찾아다녔던 상주 사벌국, 김천 감문국, 청도 이서국 등은 모두 사로국에 멸망하거나 복속돼 고유한 유적이나 역사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한(辰韓) 12국을 통일하고 신라를 건국한 사로국의 역사는 지금도 경주지역에 수없이 남아 있다.

먼저 사로국이 처음으로 왕궁을 지었다는 경주시 배동의 창림사지(昌林寺址)를 찾았다. 경주 도심에서 빠져나와 좁은 논길을 10여분 들어가자 나지막한 산이 나왔다. 산에 오르자 경주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역시 창림사지는 경주 전체를 장악했던 사로국의 첫 번째 왕궁터로 손색이 없었다. 뒤편으로 남산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더 넓은 경주평야와 형산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풍수지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이곳이 명당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다. 2천년 전의 왕궁터를 짐작케 하는 유적이나 유물은 없었지만 두 마리의 거북이 조각된 쌍두귀부와 삼층석탑, 수십개의 주초석이 남아 있어 이곳이 1천200년 전 신라 최대의 사찰인 창림사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이곳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쌍두귀부의 윗부분이 파손됐고, 석탑의 마지막 부분도 사라진 상태다. 뿐만 아니라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묘터가 자리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다시 사로국의 세 번째 왕궁터인 월성(月城)을 찾았다. 고대왕국의 화려함을 기대했으나 기자를 맞이한 것은 어이없게도 노란 옷을 입은 수백명의 유치원생들이었다. 이곳은 소나무 숲과 더 넓은 잔디광장이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로국의 5대 왕인 파사왕 22년(101) 2월에 성을 쌓았다는 월성은 규모면에서 어떠한 고대 토성보다 정교하고 웅장했다. 동·서로 900m, 남·북으로 260m, 전체 둘레만 1천841m. 성벽의 동·서·북면은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그 위를 점토로 덮었다. 성의 높이만 10여m에 이른다. 남쪽면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강철검의 나라

경주대 전덕재 교수는 "사로국은 오늘날의 경주 일대를 비롯해 울산 일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였으며, 3세기 중반부터 주변 소국을 정복해 503년 지증왕대 나라 이름을 신라로 바꿨다"며 "경상도에서 가장 강성한 고대왕국 사로국을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사로국의 유물을 보기 위해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선 평민들이 사용했다는 황토 빛깔의 붉은연질토기와 부장품이나 귀족들이 사용한 중국거울, 전기와질토기 등을 통해 당시 강성했던 사로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청동검과 철기.

경주박물관 이양수 학예연구사는 "사로국이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울산 달천광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을 다루는 제련기술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 '주몽'에서 야철대장이 강철검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연구를 했던 것처럼 당시 제련기술은 지금의 반도체 생산기술과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국가핵심기술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철이 생산되는 지역은 많았지만 이를 제련하는 기술은 몇 개 왕국에 불가했다. 사로국은 철 제련 기술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했고, 쇠로 된 농기계로 농경사회를 발전시켜 주변국가뿐만 아니라 먼 나라까지 교역을 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6] 사로국
창림사지 삼층석탑.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6] 사로국
사로국의 청동검.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6] 사로국
사로국 영역도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