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 영수 김종직… 농사직설 펴낸 정초… 과거급제자 15명 배출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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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에는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들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들어서 있다. 장원방은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조선초기 인재향으로 유명하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구미 선산은 예부터 인재향(人材鄕)으로 불린다. 야은 길재의 고향으로 역사의 중심에 섰던 수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이 선산이다. 무엇보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적 기풍이 뿌리 깊게 내려 있었다. 마을마다 글 읽는 소리로 가득찼고, 문지방을 타고 담을 넘은 글 소리는 밤새 그칠 줄을 몰랐다. 이 지역 선비들이 지향한 정신적 축과 가치는 바로 학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선산 선비들은 과거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장원방(壯元坊)이라 불리는 선산의 작은 마을 옛 영봉리는 ‘조선초기 인재향’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 개국 이후 15세기를 관통하는 동안 수많은 과거급제자가 장원방에서 배출됐다. 장원·부장원이 연이어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파워엘리트들의 요람’이나 다름없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총 13회에 걸쳐 ‘공부의 신, 천재(들)의 요람 선산 장원방(壯元坊)’ 시리즈를 연재한다. 선산 장원방을 재조명하고 이 마을 출신 과거급제자들의 이력을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들여다본다. 시리즈 첫회는 장원방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해 짚어본다.
길재의 제자 김치를 시작으로
생육신 이맹전의 장인 김성미
단종 복위 꾀한 진주하씨 집안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여물 등
역사에 남은 수많은 인재 나와
선산중 뒤편 옛 과거길 장원봉
장원급제 회화나무 명성 증명
#1. 인재향의 으뜸 장원방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선산을 이야기할 때마다 회자되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재향’ 선산을 한마디로 명징하는 역사적 증언이기도 하다. 이 기록의 모티브가 ‘선산 장원방’이다. 장원방은 옛 영봉리를 일컫는다.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 완전리 일대를 말한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이 마을에서는 무려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 이 중 장원급제자가 7명, 부장원이 2명에 이른다. 선산 중에서도 옛 영봉리를 ‘인재향의 으뜸’으로 꼽는 이유다. 이러한 영봉리를 조선시대에 장원방으로 불렀다. ‘장원급제자가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서당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원방이라는 이름을 공식 문헌에 처음 소개한 이는 이 마을에서 공부한 김종직이다. 영남사림의 영수로 조선 역사의 중심에 섰던 김종직은 1476년 선산부사로 부임한다. 당시 그는 선산지리도(善山地理圖)를 완성하고 지도 위에 선산을 상징하는 10가지(선산10절, 善山十絶)를 시로 쓴다. 선산10절 중 하나가 바로 옛 영봉리, 장원방이었다.
鄕人從古重膠庠/ 翹楚年年貢舜廊/ 一片城西迎鳳里/ 靑衿猶說壯元坊
마을 사람이 예로부터 학교를 중히 여기어/ 뛰어난 인재들을 해마다 조정에 바치었네/ 성 서쪽에 자리 잡은 조그만 마을 영봉리를/ 학도들은 아직도 장원방이라 말하누나
김종직이 극찬한 장원방은 조선 개국부터 15세기 전반기까지 60여년 동안 과거시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 기간에 선산출신 문과 급제자는 총 36명, 이 가운데 12명이 장원방에서 배출됐다. 장원 혹은 부장원으로 합격한 수는 총 7명인데, 7명 모두가 장원방 출신이다.
조선시대 과거급제는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는 1차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그중 문과가 가장 어려웠다. 문과 급제는 대를 이어 문벌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코스였고, 돈 없고 배경 없는 가난한 시골 선비들에게는 유일한 출세길이었다. 재수와 삼수, 심지어는 한평생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때문에 보통 7~8세 때 서당에 들어가 20~30년은 공부에 매달려야만 급제를 할 수 있었다. 장원이나 부장원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더욱 험난했다. 과거시험을 해마다 시행한 것도 아니었다.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는 3년에 한번씩 치렀다.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치른 부정기시험이 있었지만 그리 자주는 아니었다. 험난한 과거시험 과정 속에 장원방에서 수많은 급제자가 배출되고 장원·부장원이 잇따라 나온 것은 이 마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 공부의 신 15명의 급제자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과거급제자는 길재의 제자 김치(金峙)다. 그는 고려 창왕 즉위년인 1388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조선 초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에 올랐다. 김해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원방에 살면서 김숙자와 함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숙자의 아들이자 장원방을 극찬했던 김종직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김치의 사위 정지담(鄭之澹)도 장원방 출신으로, 1416년(태종 16) 친시(親試) 을과(乙科) 급제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지낸 전가식(田可植)은 조선조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장원급제자다. 그는 1399년(정종 1)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서 1등을 차지했다. 중앙관직에 나아가서는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관료였다. 1449년(세종 31) 84세로 세상을 뜨자 세종이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의 장인 김성미(金成美)도 빼놓을 수 없다. 1378년(고려 우왕 4) 장원방에서 태어나 조선 태종 때 문과에 등제됐다. 일부 문헌에는 ‘태조 때 급제했다’는 기록도 있다. 예문관직제학 겸 군기시판사를 지낸 김성미는 충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사위 이맹전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중앙무대에 나가지 않았다. 매일 아침 뒷산에 올라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서(農書)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정초(鄭招)도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그는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에 올랐다.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 집안은 장원방의 명문가로 꼽힌다. 김숙자는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그의 두 아들 김종석(金宗碩)과 김종직(金宗直)도 장원방에서 학문을 닦으며 문과에 급제했다.
장원방의 최고 가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집안이다. 하담(河澹)을 비롯해 그의 아들 하강지(河綱地), 하위지(河緯地), 하기지(河紀地)가 대를 이어 급제했다. 아버지 하담은 1402년(태종 2)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을, 사육신으로 이름을 떨친 아들 하위지는 1438년(세종 20) 식년시 을과에 장원급제했다. 하위지는 어릴 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탓에 동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강지는 1429년(세종 11) 식년시에 급제했고, 하기지는 형 하위지와 같은 해인 1438년(세종 20년) 식년시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급제한 유면(兪勉)은 하담의 장인으로 그 역시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처가를 합쳐 한 집안에서 5명(하담,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유면)의 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의 대표적인 가문이다. 하지만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꾀하다 하위지가 처형되면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하고 말았다.
세조대에 이르러 하위지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면서 장원방에서는 과거급제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선초기 인재향’이라는 명성도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장원방의 학풍이 뿌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앙무대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을 숭상하는 전통과 정신적 가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학풍은 16세기 후반 영남사림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중앙무대에 복귀하면서 다시 빛을 발한다. 명맥이 끊겼던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는 선조대에 이르러 다시 배출됐다. 그 명맥을 이은 인재가 김여물(金汝)이다. 그는 1577년(선조 10)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며 ‘인재향 장원방’의 옛 영광을 재현했다. 김여물은 임진왜란 때 신립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섰다가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물에 투신해 순국한 인물로 유명하다.
김여물 이후에는 박춘보(朴春普)가 1738년(영조 14)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성품이 강직했던 그는 조정의 제반사를 능숙하게 처리해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명필로 이름을 떨쳤고, 선산읍성 낙남루의 상량문을 직접 짓기도 했다.
#3. 지금 장원방에는…
조선초기 인재향으로 명성을 떨쳤던 장원방은 지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무엇보다 이 마을 출신 인재들과 관련된 문화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생가는 물론이고 그들이 공부했던 곳도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효행이 지극했던 김치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렸던 정문(旌門)은 문헌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김치가 선산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었던 사당도 마찬가지다. 단계 하위지가 공부했던 독서당(讀書堂)과 그가 수양대군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한때 낙향해 거처했던 공북헌(拱北軒)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선산 선비들이 걸었던 과거길을 이웃해 솟아있는 봉우리가 ‘장원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현재 선산중학교 뒤편에 남아있다.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할 당시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담벼락에 끼여 위태롭게 서있다.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 한켠에 15명의 과거급제자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장원방의 옛 명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역 원로들은 장원방을 구미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은호 전 구미문화원 원장은 “선산 장원방은 인재향 구미를 상징하는 곳이다. 한 마을에서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곳은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장원방을 지속적으로 재조명하고 사라진 문화재를 복원해 구미를 대표할 수 있는 랜드마크로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기획:구미시
장원방에서 배출된 과거급제자 현황
● 김치(金峙) |
창왕 즉위년(1388) 무진방(戊辰榜) 병과(丙科) 4위(문과 급제) |
● 전가식(田可植) |
정종 1년(1399)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 하담(河澹) |
태종 2년(1402)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문과 부장원) |
● 유면(兪勉) |
태종 5년(1405)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 김성미(金成美) |
태종 때 문과 급제(일부 문헌에는 태조 때 급제한 것으로 기록) |
● 정초(鄭招) |
태종 5년(1405)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문과 부장원) |
● 정지담(鄭之澹) |
태종 16년(1416) 친시(親試) 을과1등(乙科一等) 1위(문과 장원) |
● 김숙자(金叔滋) |
세종 1년(1419)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위(문과 장원) |
● 하강지(河綱地) |
세종 11년(1429)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9위(문과 급제) |
● 하위지(河緯地) |
세종 20년(143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 하기지(河紀地) |
세종 20년(1438)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문과 급제) |
● 김종석(金宗碩) |
세조 2년(1456)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1위(문과 급제) |
● 김종직(金宗直) |
세조 5년(1459)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0위(문과 급제) |
● 김여물(金汝 ) |
선조 10년(1577)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위(문과 장원) |
● 박춘보(朴春普) |
영조 14년(173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문과 장원) |
<자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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