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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Y인터뷰] 프로야구 선수 출신…김명제 휠체어 테니스 선수

2018-03-03

“최고의 휠체어 테니스 선수 돼 잠실야구장서 프로야구 시구하고 싶다”

20180303
지난달 23일 대구시 달서구 두류테니스장에서 김명제 대구장애인체육회 휠체어 테니스선수가 스매싱을 하고 있다. 황인무기자 him7942@yeongnam.com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김명제는 2005년 야구판을 뒤흔든 거물급 신인투수다. 188㎝에 93㎏으로 투수로는 최고의 피지컬을 갖췄던 김명제는 150㎞의 강속구를 뿌렸고, 날카로운 슬라이더까지 던졌다. 춘계리그와 대통령배 대회에서 8경기에 출전해 4승무패 평균자책점 2.20으로 맹활약하며 고교무대를 평정했다. 휘문고 졸업을 앞두고 KBO리그 구단들은 물론 메이저리그의 LA다저스와 뉴욕메츠까지 달라붙었을 정도다. 거액을 제시한 두산이 스카우트 전쟁의 최종승자였다. 당시 김명제가 받은 계약금 6억원은 상징적인 액수다. 지금까지도 두산 역대 최고액 신인 계약금 기록이며, KBO리그를 통틀어서도 역대 신인 계약금 공동 5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김명제는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수준급 활약을 펼쳐주지 못하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완만한 성장곡선을 그리던 김명제에게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한 것은 2009년이다. 밤늦게 차량을 몰고 가다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고가차도 아래로 떨어지는 대형사고였다. 진단 직후 하반신 마비가 예상될 정도로 크게 다쳤다. 불미스러운 일까지 이어졌다. 혈액채취 검사 결과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로 판명난 것이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투수에게 보내오던 동정여론은 곧바로 비난의 화살로 바뀌었다. 김명제는 결국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야구판을 떠나야 했다. 자취를 감췄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야구장이 아닌 테니스 코트다. 2014년 휠체어 테니스선수로 변신한 그는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올해 대구로 내려왔다.

▶사고 이후 테니스 라켓을 잡기 전까지 도통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디서 뭘 했는가.

“상실감이 커서 완전히 은둔생활을 했다. 사실 사고 직후 담당의사가 부모님께 하반신 마비가 올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부모님은 내가 희망을 잃을까봐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약 1년 동안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재활에 임했지만 나아지지가 않아서 직감했다. 실망감이 컸고, 병원에 재활하러 가면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해서 밖에 나가기가 싫어지더라. 그래서 집에서 영화나 드라마만 보고 게임을 하면서 생활을 했다. 친구들이 나를 보기 위해서 집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고교 특급투수로 메이저리그서도 관심
2005년 두산 역대 신인 최고액에 입단
2009년 교통사고로 큰 부상 마운드 떠나

몇 해 집에만 틀어박혀 완전 은둔생활
휠체어테니스 보고 운동 열정 되살아나
서울대표로 장애인체전 금·은·동 활약

박세덕 코치가 같이 훈련해 보자 제안
대구 와 장애인체육회 소속으로 뛰어
4월 국가대표 선발전…태극마크 목표



▶휠체어 테니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새 인생을 살려고 했는데 막상 되돌아보니 야구밖에 한 것이 없더라. 두산 쪽에서는 일본에 가서 일을 좀 배워보라고 권했고, 부모님이 식당을 운영하는데 거기에서 일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2013년쯤에 장애인 직업학교 코스가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직업학교에서 적성을 찾아 새 인생을 시작하려 했는데, 그때쯤에 휠체어 펜싱선수 친구를 사귀게 됐다. 그 친구가 지인 중에 휠체어 테니스를 하는 이가 있다며 나에게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 선수가 달성군청 휠체어 테니스 팀의 한성봉 형인데 서브를 넣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내가 흥미로워하니까 친구가 휠체어 테니스를 시작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원래 다시는 운동을 안 하려 했다. 그래도 구경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휠체어 테니스 선수들이 있는 올림픽 공원에 찾아갔다. 성봉이 형처럼 그분들도 멋지더라. 속에서 다시 열정이 끓어올라 운동을 시작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014년 헤드 휠체어 테니스 팀에 입단한 이후의 행보는.

“헤드팀에 입단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팀이 해체됐다. 그래서 테크니파이브라는 팀에 다시 입단했다. 거기에서 활동하며 기술을 차근차근 익혀갔다. 야구와 비슷한 면들이 보였다. 서브는 투수가 공을 던지는 것이고, 되받아 치는 것은 타자의 스윙 같았다. 그리고 공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내야수비 동작과 비슷했다. 20년 가까이 운동선수로 살았으니 기량이 나름대로 올라왔다. 그래서 장애인 전국체전 단·복식에서 금, 은, 동을 차지했다. 그런데 내 욕심만큼 기량이 오르지 않았다. 여건이 좋지 않아서 훈련을 잘 할 수가 없었다. 일반인들과 일반선수들, 휠체어 테니스 선수들까지 코트를 같이 쓰다 보니 오랜 시간 훈련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테니스는 그냥 취미로 즐기고 다시 다른 쪽으로 일을 하려 생각했다. 야구장 레슨장을 차릴 계획도 있었다.”

▶대구로 온 계기는.

“작년에 서울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했다가 박세덕 코치를 알게 됐다. 박세덕 코치는 대구에서 초·중·고교 일반 테니스부 코치 경험도 있고 지금은 대구장애인체육회 소속으로 생활체육지도자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분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야구 선수 출신인데 휠체어 테니스를 하고 있어서 기량이 좋아질 수 있는 선수’라는 정보만 듣고 대구에서 충북으로 찾아왔다. 경기가 끝난 후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대뜸 내 실력에 대해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하더라(웃음).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했다. 같이 훈련해서 최고의 선수가 돼보자고 했다. 나를 키워준다고 한 거다. 그리고 한창 성장할 수 있을 때 해봐야지 결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선수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휠체어 테니스도 그저 그런 선수로 남고 싶지 않았다. 나를 키워주겠다는 말씀에 진정성이 느껴져 대구로 와서 장애인체육회 소속으로 뛰게 됐다.”

▶대구에 특별한 인연이 있지도 않을 텐데.

“사실 대구는 안 좋은 기억뿐이었다(웃음). 내가 야구를 하면서 10점에 가까운 점수를 줘 본 적이 없는데, 그때 4이닝 9실점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시민야구장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다. 당시 김경문 감독이 2군에 내려가라고 했는데, 경기가 끝난 후 회식자리에서 옆자리로 부르더니 ‘너 한번 더 기회 주면 잘할 수 있냐’고 묻더라. 그래서 내가 ‘네’라고 대답하자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 잔을 시작으로 코치들이 돌아가면서 따라주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속이 완전히 뒤집어졌는데, 그때부터 대구지역 소주인 ‘참소주’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금은 내 절친인 이원석이 삼성 라이온즈에 와있다. 대구와는 그 정도의 인연이 있는 것 같다.”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지금 대구장애인체육회 소속으로 돼 있지만 월급 받고 뛰는 선수는 아니다. 일단 두류테니스장에서 훈련을 할 수 있지만, 급여를 줄 실업팀은 내가 직접 찾아야 한다. 나는 휠체어 테니스 중에서도 ‘쿼드등급(장애 정도가 중증에 해당하는 선수)’에서 뛰고 있다. 달성군청 테니스팀은 윗등급에 해당해 내 자리가 없다. 지역 내에서는 쿼드등급 팀이 아예 없다. 지자체에서 나를 받아주면 좋겠지만, 쿼드등급의 경우 단체전이 없어서 창단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에 점수 배점이 큰 만큼 지자체 입장에서는 단체전에 참여할 수 있는 팀 구성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자비를 들여 대구로 이주해왔고, 훈련 비용부터 대회 참가까지 모든 비용을 내 돈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세덕 코치도 마찬가지다.”

▶어려움 속에서 당장 목표를 둔 것이 있다고.

“올해 4월에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참가해 메달을 따고 싶다.”

▶궁극적인 목표는.

“앞서 말했다시피 야구판에서는 정말 아쉽게 나왔다. 휠체어 테니스마저 어설프게 끝내고 싶지 않다. 정말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해서 좋은 성과도 내고 싶다. 휠체어 테니스 선수가 된 이후 두산 측에서 시구 요청을 해왔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최고 자리에 올라섰을 때 잠실야구장으로 돌아가 팬들 앞에서 시구를 하고 싶다. 그리고 팬들에게 사죄의 인사도 다시 드리고 싶다.”

명민준기자 minju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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