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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강 칠현 일곱가문이 400여년 이어온 ‘모꼬지 우애’

2018-06-13

광산이씨 문중 일가서 열어
2013년부터 석채례 봉행도

낙강 칠현 일곱가문이 400여년 이어온 ‘모꼬지 우애’
광산이씨 문중 일가들이 400여 년 전통의 모꼬지를 하고 있다.

‘모꼬지를 아십니까?’

400년 이상을 이어온 전통의 모꼬지 모임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사망정(四望亭)이라는 표지석이 있는 고령군 성산면에 도착한 것은 지난달 말. 산 쪽 계단을 올라가니 아담한 정자가 나타났다. 아래쪽에 낙동강이 보이고 강 위를 가로지르는 고령교가 보인다.

입구 표지판을 보니 육일헌(六一軒) 이홍량 선생이 1587년에 세운 정자로, 낙동강가의 아름다운 풍광 4가지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정자 안에는 여러 사람이 벌써 모여 부산한데, 이홍량 선생의 13세손인 이방현씨(78)가 나와서 오늘의 행사에 대해 알려줬다. 이씨는 “모꼬지란 집안의 화합 모임으로, 400여 년의 전통을 이어왔다”고 말했다.

핵가족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각박해진 요즘 세태에 모꼬지라니. 부럽기 그지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알려주는 정자 앞 비석들을 보니 벼슬을 마다하고 산중처사를 자처한 광산이씨 육일헌공의 유적비와 공의 자제들인 슬곡 양촌의 유적비, 또 공의 손자 농암공 유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또 파리장서 사건에 서명하신 애국지사 만회 이병회(李柄回) 선생 비석도 있다.

같은 문중의 13세손인 이창호씨(70)가 반대편의 낙강칠현(洛江七賢)이라고 쓰인 시비(詩碑)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이 비는 선조 22년(1589) 5월에 낙동강 유역에서 서로 교유하던 7분의 현인이 이곳 사망정에 모였다가 강정에서 개포까지 뱃놀이를 하면서 읊은 시를 써 놓았다”고 말했다.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넓고 푸른 물결과 저물어 가는 하늘)’이란 시제를 한 자씩 분운(分韻)하여 쓴 시로, 성산인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완산인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광산인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청주인 한강(寒崗) 정구(鄭逑), 고령인 송암(松菴) 김면(金沔), 밀양인 대암(大庵) 박성(朴惺), 광산인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선생 등이다.

이들은 높은 학문을 가진 분들로 서로 흠모하며 교유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은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진중에서 숨지고 이기춘은 김면의 진중에 백의종군하였으며 박성은 학봉 김성일의 막료로 전력분투했다. 정구는 왜란 시 통천군수로 있으며 둔전(屯田)을 경작하여 군량미를 비축했다.

이홍량은 거창에서 지역민과 화살촉을 만들어 김면에게 공급하다가 임진년 11월에 세상을 떴다. 모재 이홍우는 의병을 일으켰고 청휘당 이승은 왜란을 맞아 사재를 털어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여 고령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평시에는 학문에 힘쓰며 서로 교유하다가 전시에는 분연히 나라를 위해 힘을 쏟은 낙강 칠현. 그분들의 후손들이 2013년 11월에 이 시비를 세우고 매년 5월29일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한다고 한다. 1589년 5월에 교유하던 선비들의 모임이 400여 년의 시간을 지나 아직까지 후손들의 모임으로 연결되다니…. 돌아오는 길, 푸른 물결 위의 낙동강을 바라보니 뱃놀이의 흥에 취했을 옛 현인들이 떠올려진다.

글·사진=박태칠 시민기자 palgongsan7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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