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40508010001123

영남일보TV

[더 나은 세상] 리퀴드 골드, 금비

2024-05-09

농부들에게 이 시기 비는
귀해서 리퀴드골드로 불러
나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눈앞의 현실 몸으로 체험때
내 약점과 불안 '금비'될수도

2024050801000278500011231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5월1일. 춥고 비가 내렸다. 이웃도시 캘거리는 눈이 온다고 했다. 그래도 캘거리보단 낫네. 다음날, 이곳에도 눈이 내렸다. 5월이란 말이다, 5월. 한국은 이미 봄꽃들이 지고 더워지기도 한다는, 봄의 절정을 지나 여름이 시작되려는 시기. 반년 가까운 긴 캐나다의 겨울을 보내고 이제야 봄 내음 겨우 느끼기 시작하는 우리에게 너무하지 않은가.

프레리(prairie), 대평원이라는 영어 단어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체감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본 적이 없으니까. 지평선이란 단어처럼. 이곳에 와서 지형이 flat 평평하다는 게 뭔지, 산이라고 할 것이 보이지 않는 풍경이 낯설고 어딘가 오르막을 걷고 싶은 마음이 한 번씩 불쑥 일어날 때마다 제대로 느끼는데, 우리 주 남부는 중부인 우리 도시보다 더 flat하다고 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도대체 어떤 거지? 어디에도 눈 둘 곳 없는 평평한 지형은 내게 편안함보다는 불안함을 일으켰다, 마치 아무것도 손에 잡고 의지할 데 없이 광활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느낌이랄까.

4월 중순, 그랜드 캐니언을 다녀왔다. LA에 도착해 지인의 차를 타고 달리며 palm tree(야자수)와 초록빛 나무가 있는 산을 보며, 노스탤직하다고 말했다. 처음 유학생활을 하와이에서 시작한 내게 북미라는 대륙은 녹색 나무와 산이 있는 따뜻한 날씨로 세포 속에 기억되었나 보다. 익숙하고 반갑고 안정감을 느꼈다. 사막지역에서 북미생활을 시작한 지인은 그 주에 출장갈 때마다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며칠 전 단과대 직원과 이야기하다 이 지역 출신인 그녀가 말했다. 남부에서 자란 그녀는, 한국인 기준에는 여전히 너무 평평한 주 북부지역만 가도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나무와 산은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준다나. 시야에 아무것도 걸릴 것 없이 탁 트인 드넓은 대지가 안정감을 준다고. 그리고 캐나다 중서부의 대평원지대에서 자란 사람들이 좋은 선원이 된다고도 했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비슷하게 작용해서 멀미를 덜 한다나. 그리고 자신은 겨울이 더 좋다고 했다. 물론 영하 40℃ 같은 극한의 추위는 싫지만 겨울이 훨씬 더 quiet 조용하다고. 인적없는 겨울밤, 밖에 나가 걸어보면 들리는 자연의 소리들이 많다고. 그리고 농부들에게 봄비는 씨앗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귀한 존재라고 했다.

지난 일요일, 또 하루종일 비가 왔다. 모임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봄에 비오는 거 싫냐고. 좋진 않지만 농사에는 좋다고 들었다고 했다. 반색하며 그게 서스캐처원주에 사는 태도 right attitude 라고, 농부들한테 좋으면 무조건 좋은 거라고 했다. 농부들에게 이 시기 비는 너무나 반갑고 귀해서 리퀴드 골드(금비)라고 부른다고.

삶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러할까? 나의 불안은 누군가에겐 안정감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한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불안과 불편함 때문에 제대로 보고 듣지도 않고 놓치는 경험들이 많을까?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지금 눈앞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해 나갈 때, 감각은 더 섬세해지고 나의 약점과 불안은 금비가 될 수도 있다.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