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에서 국회의원(비례대표)에 당선된 김위상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은 노사 화합과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한 의정활동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노동을 먼저 해야 했다. 먹고사는 문제만큼 직접적이고 살벌한 위협은 없었다. 경북 북부 오지마을에서 태어난 꼬맹이는 찢어지게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모살이 떠나는 모친과 함께 서울에 도착, 신문팔이·껌팔이·구두닦이 등을 닥치는 대로 해봤다. 그토록 몸부림을 쳤지만 야속하게도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긴 터널에서 그를 지탱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장의 밥이 아닌, 배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머리를 쓰는 만큼 수입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길거리에서 깨우치며 더욱 간절해졌다. 초·중·고교 졸업장이 없는 상태로 향학열을 불태운 그는 꽤 늦은 나이에 대학졸업장에 이어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끈기를 보여줬다. 학업과 생계를 위해 고정적인 수입원이 절실했던 시절, 우연한 기회에 택시 핸들을 잡게 됐고, 이는 훗날 그의 인생을 노동운동이라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젠 30년 이상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기업·지역사회 간 상생을 위한 정치인의 삶을 준비 중이다. 제22대 국회의원 당선인 김위상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66·국민의힘)의 이야기다.
청송서 2남3녀중 넷째로 태어나
식모살이 모친 따라 서울로 가
초교도 못 다니며 신문배달 등
하지만 고달픔만 더하는 현실
대구로 와선 학비 없어 中 자퇴
그렇게 10대 후반 산업현장으로
직조공장서 만난 동갑내기 아내
"지금의 김위상 있게 한 고마운 이"
89년 택시 핸들잡고 노조 일 인연
위원장 당선후 해고 등 우여곡절
12년째 한노총 대구본부의장직
2014년 노사정 대타협 선언대회
30여년 이룬 일 중 가장 기억남아
이젠 현장경험 바탕 정치인의 삶
"대구경북 경쟁력 강화에도 전력"
◆지지리도 가난했던 유년시절…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산 좋고 물 좋은 청송군 주왕산면(옛 부동면) 라리. 얼음골이 지척에 있는 이곳이 김 당선인의 고향이다. 2남3녀 중 넷째인 그는 가난과 함께 아픈 가족사를 겪으며 성장했다. 그리 크지 않은 남의 논밭을 경작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호구지책이었기에 쑥이나 칡뿌리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형님은 큰 집에 양자로 갔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을 등지고 모친 따라 서울로 갔다. 축대 사이 공간에 천막을 치고 동대문시장에서 파지나 쓰레기 등을 가져와 땔감으로 썼다. 1년 뒤 부친까지 서울로 합류했으나 생활이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했다. 본능이었다. 처음 시작한 신문배달을 통해 잔지판매가 훨씬 남는 장사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배달구역을 확대하면서 잔지발생량을 늘렸다. 이후 다방이나 경양식집 등지를 돌며 껌을 팔았고 구두닦이 등 수입이 생기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뼈 빠지게 고생한 보람은커녕 고달픔만 더해가는 현실을 원망했다. 굳이 서울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고향과 가까운 대구로 내려왔다. 초등학교도 옳게 못 다닌 아들이 늘 짠했던 모친은 중학교 졸업장이라도 쥐여주고 싶은 마음에 또래들보다 3살이 더 많은 그를 경신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공납금을 제때 내지 못해 결국 자퇴를 하게 된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수많은 좌절이 그의 앞을 막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움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동경은 더욱 커져만 갔다. 쓰리고 아팠던 청소년기의 기억과 경험은 그의 인생에서 불굴의 의지와 강한 추진력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예기치 못했던 수많은 터닝포인트… 시련이 그를 키웠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그는 10대 후반에 산업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직조공장과 비닐공장 등지를 다니며 생계를 꾸리던 20대 초반, 친척 소개로 동갑내기 부인 강숙희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보금자리가 코딱지만 한 월세방이었지만 심리적 안정은 컸고, 미미하게나마 그때부터 쪼들림의 강도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의성 안계 출신으로, 직조공장을 함께 다닌 부인은 대구시 달서구 감삼동에서 20여 년 전에 차린 자그마한 과일가게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부인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위상도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에겐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다.
1989년 11월 그는 택시와 인연을 맺었다. 공장보다 보수가 좋다는 게 유일한 이유였다. 2년이 흘렀을 즈음,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더 있어 보여 틈틈이 책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노동조합 총무를 맡았고 갑작스러운 노조위원장의 유고로 떠밀리다시피 92년 10월 위원장 선거에 출마, 당선이 된다. 불합리한 부분을 개선하고 정당한 노동가치를 인정받으려는 그의 노력에 회사 측은 해고로 대응했다. 조합원들의 노력 덕분에 복직을 하게 됐고 이는 노동운동에 전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3수 끝에 2003년 전국운수서비스산업노동조합 대구지역본부 의장이 되면서 활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반대세력의 투서와 진정으로 6개월간 수사를 받았고 1년 조금 넘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전임 집행부의 문제로 촉발된 사건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사건 전개과정과 그의 진심을 잘 아는 대부분 조합원들의 지지에 힘입어 차기 선거에서 옥중당선되는 특이한 이력을 남기기도 했다. 2006년 10월 교정의 날 모범수로 출소하던 날, 교도소 문 앞까지 대규모로 찾아와 축하해준 동료들의 고마움에 울컥한 그는 '직책을 맡고 있는 이상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는 2013년부터 한국노총 대구지역본부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외치는 노동운동의 가치는 상생… 국회에서도 '쫄지' 않겠다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서 그의 생각은 많아졌다. 어깨도 훨씬 무거워졌다. 30년 이상 현장을 다니며 파악한 현실과 경험을 어떻게 국회에서 녹여낼지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보편적 권익을 향상하고 보장·보호하는데 여·야가 따로 없고 보수와 진보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노와 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폭넓게 보면 지역사회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그는 2014년 전국 광역단체 중 처음으로 개최한 '대구지역 노사정 평화 대타협 선언대회'를 지금껏 이뤄온 일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노사 간 갈등과 대립을 넘어 상생하면서 지역경제 발전에 힘을 모으자는 취지였다. 일부 강성 조합원들의 반대와 비판이 없진 않았으나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대구가 안정적인 노사관계 모범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대구에서의 사례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픈 바람을 갖고 있다. 노사의 극한 대립으로 적지 않은 직·간접적 갈등비용을 지불해 온 케이스는 차고 넘친다. 노사 상생을 위한 전국 최초의 소통 및 교육 공간인 '노사 평화의 전당' 건립과 청년교육 및 취업을 위한 한국노총 인적자원전문학교 설립 등은 그의 소신과 의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결과물인 셈이다. 이달 말 여의도 입성이 예정된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노사 상생이 화두다. 국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은 정해졌고 방법론만 남았다. 특히 중소기업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구경북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 가능한 대안을 찾는 데 미력한 힘이나마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장준영 논설위원 changcy@yeongnam.com
장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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