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선죽교에서 흘린 ‘피의 충절’ 고향 영천서 면면히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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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영천 임고서원이 최근 1차 성역화 사업을 마치고 역사문화 탐방객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
선사시대 금호강 원류지대인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유적이 많고, 삼한시대 골벌소국이란 부족국가를 형성했던 곳이다. 아울러 예부터 충효의 고장으로 선현이 많이 배출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문화재 가운데 영천시가 최근 1차 성역화 사업을 마친 임고서원이 역사문화탐방객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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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의 영정인 조기사모본. |
임란때 소실
대원군땐 훼철
많은 수난에도
보물 ‘영정’과
서적 200권 소장
2·8월엔 향사…
孝 상징 유허비
땅 속서 찾기도
입구의 은행나무
수령 500년 추정
높이만 30m
가을 ‘노란 운치’
철조여래좌상
산수정 등
인근에도 볼거리
◆정몽주 위패 모신 임고서원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위치한 임고서원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임고서원은 1553년(명종 8)에 포은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당시)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54년에 ‘임고’라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사액되었다.
임고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며,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해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다. 1965년에 복원돼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 정부의 보조로 현재의 위치에 이건됐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존영각·강당·포사, 유사실(有司室) 등이 있다. 사우인 문충사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에는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유물로는 정몽주의 영정 3폭과 포은문집 목판 113판, 지봉유설 목판 71판, 포은집, 어사성리군서 11권 외에 200여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경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내의 은행나무는 경북도 기념물 제63호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성리학이 고려와 조선에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존송받는 학자이다. 또한 고려말 국운이 기울어 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한 이성계, 정도전 등의 개국세력을 상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개성의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된 인물로, 후세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지킨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포은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노래는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지어 부른 ‘하여가’에 대한 화답시로, ‘단심가(丹心歌)’라 한다. 정몽주는 이 단심가로 굳은 절의(節義)를 보임으로써, 끝내 이방원의 무리에게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임고서원과 인근은 보물 창고
임고서원 및 주변에는 문화관광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임고서원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는 경북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높이 30m·둘레 5.95m에 이르며, 수관 너비는 동서 방향으로 약 22m, 남북 방향으로 약 21m에 이르고 있다
본래 이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에 임고서원을 찾으면 노란 은행잎과 함께 특별한 추억을 담아갈 수 있다.
포은선생의 효성을 느낄 수 있는 정몽주 유허비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로, 공양왕 원년 그의 출생지인 임고면 우항리에 세워져 있다. 그는 고려 공민왕 5년 부친의 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상을 지내고 그후 1365년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묘소에서 3년을 지냈다.
그의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보고되어 공양왕 원년에 세운 것으로, 그후 조선 성종 18년 경상감사 손순효의 현몽에 의하여 잃었던 비를 땅속에서 찾아내어 비각을 세워 모시고 있다.
1629년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정몽주 영정은 보물 제1110호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정재료는 비단으로, 가로 98㎝·세로 98㎝이며, 조선후기 김육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임고서원을 둘러본 뒤 중요민속자료 제24호로 지정된 매산고택과 산수정이 지친 심신을 풀어준다.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1757)가 원래 살던 임고면 선원리에 천연두가 만연하자 이곳으로 옮겨와 짓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정일감(鄭一鑑)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3칸의 솟을 대문이 있는데 가운데 칸만 대문간이고, 양쪽에 마판(馬板)과 행랑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1.5m 높이의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본채가 있다.
본채 건물은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이다. 단지 여기서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물 오른쪽 앞으로 사랑채와 누마루를 사랑방과 직각을 이루어 덧붙인 형식이 특이하다.
집의 서북쪽 골짜기 암벽 위에는 산수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인데 좌우 양쪽 칸은 온돌방이며 가운데 칸과 앞퇴에는 마루를 깔았다. 원래는 아랫사랑, 고방채 등 여러 부속채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안채·사랑채·사당과 산수정만 남아 있다.
임고서원에서 차량으로 10여분 달리면 임고면 선원리에 위치한 고려 전기의 양식을 나타내는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전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1969년 7월30일 보물 제513호로 지정됐다. 전체 높이는 151㎝, 머리 높이 49㎝, 어깨 너비 77㎝, 가슴 너비 48㎝, 무릎 높이 101㎝이다.
이 철불좌상은 길다란 눈썹과 크고 길게 치뜬 눈, 작은 코와 입, 짧고 융기된 인중, 깊게 팬 보조개 등으로 매우 경화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근엄한 표정이지만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가슴도 발달된 건장한 신체를 표현하였으며,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이고, 허리·팔·다리 등은 수척한 편이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민불 붕어회가 유명한 영천댐을 지나 자양면에 들어서면 조선 초기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耕隱) 이맹전을 추모하여 1786년(정조 10)에 어명으로 건립한 이맹전 부조묘가 자리잡고 있다.
이맹전은 조선 세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를 거쳐 정언, 거창현감 등을 지냈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탐내자 벼슬을 사퇴하고 선산에 내려가 학문을 닦으며 일생을 보냈다.
이맹전부조묘와 용계서원(龍溪書院), 이맹전제단(李孟專祭壇)이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북동향을 하고 있다. 부조묘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3량가 홑처마로 화강석 3벌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영천=유시용기자 ys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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