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도 불길 타고… 세속의 욕심 사그라지네
|
| 장성용 도예가가 장작가마 앞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불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1964년 예천에서 태어났다. 계명대 미술대학, 홍익대 산미대학원을 나왔다. 계명대 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문화예술회관, 대백프라자갤러리, 두산갤러리, 수성아트피아 등에서 여덟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대구공예대전 대상, 경북도미술대전 최우수상 등을 받았다. 대구공예대전, 대구공예품경진대회, 한국공예대전 등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현재 계명문화대 교수이며 대구공예대전, 경북도미술대전, 대구산업디자인전 등의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과 갈등의 시간들
힘들었지만 스스로 가다듬는 기회
‘백자’ 논문으로 박사학위 받은 후
본격적으로 백자 제작에 들어가
실패 거듭하면서 도예 의미 깨달아
“도예는 ‘불과의 대화와 교감’
인간의 힘으로만 되는 것 아냐”
|
| 작업실 앞마당에서 작업실이 있는 행화골마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성용 도예가. 이지용기자 |
작가는 누구나 자신만의 작업실을 갖고 싶은 소망이 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늘 함께하는 상당수 작가에게 개인작업실을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예가 장성용씨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선배의 작업실에 얹혀서 작업을 했다. 같이 작업하는 선배가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지만 같은 공간을 쓰는 데서 오는 불편함, 없는 자가 느끼는 묘한 서러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장씨는 1996년 성주군 대가면 행화골마을에 작업실을 지었다. 당시 자신만의 작업실이 절실했던 그는 세 가지 이유로 이곳을 택했다. 대구에서 차로 이동할 경우 한 시간 정도의 거리라서 가깝고, 마을 안쪽에 자리 잡아 조용했다. 게다가 땅값도 싸서 보는 즉시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 넓지 않은 면적, 마을 구석에 있어 좋지 않은 위치였지만 그는 자신만의 작업실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며 작업실을 짓고, 주말마다 그곳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이 닥쳤다.
“이 마을은 지하수를 사용하는데, 도자기 공장이 들어오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서 수질을 오염시킨다고 마을 주민들이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고 나니 방학 때 아이들이 찾아와서 작업하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는 분들이 또 나타났지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이 작업실에 찾아와 도예기술을 배우고 싶어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반대를 한 것이지요. 제가 외지인이었으니까요.”
장작가마를 처음 땠을 때 마을에 불이 난 줄 알고 벌어진 소동도 장씨가 이곳에 처음 들어와서 겪은 잊지 못하는 일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일을 겪은 그는 이제 마을 주민이 다 됐다.
“3~4년을 명절마다 마을 어르신들의 집을 돌며 인사를 드리고, 문고리 고장 난 것 고쳐 주고, 불이 나간 형광등을 갈아 주니까 어느 순간 ‘이제 그만 인사 오고, 그렇게 애를 안 써도 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비로소 마을 주민으로 인정해주신 것이지요.”
이렇듯 그는 성주의 시골마을 주민으로 흡수되어 갔다. 그는 이런 과정이 즐거웠다고 말한다. 어르신들과 갈등이 있을 당시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마는 지나고 보니 이런 과정들이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 간의 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깨닫게 됐다.
이렇다 보니 작업실에 거의 혼자 있지만 그는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가끔씩 아내가 반찬 등을 가져다주기 위해 잠시 오는 것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인들이 외롭지 않느냐, 대문도 없는데 무섭지 않느냐고 묻곤 하지요. 시골에 살면 이런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편안하다는 이야기겠지요.”
일주일에 절반은 대구에서, 나머지 절반은 성주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그는 잠자는 것부터 당장 차이가 난다고 한다. 대구에서 늘 선잠을 자다가 이곳에 오면 숙면을 취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영락없이 시골사람이 다 된 것이다.
장씨는 2008년 ‘조선시대 백자에 나타난 미의식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 논문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분청사기를 주로 만들었다.
그는 백자 제작을 도공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재료의 탐색부터 소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능, 숙련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백자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청자는 1천250~1천280℃에서 굽는데, 백자는 1천300℃까지 온도를 올려 구워야 됩니다. 20~50℃에 불과하지만 이 온도를 올리는 데 엄청난 양의 땔감이 필요하지요. 현재의 기술로도 이 온도를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데 옛날에는 어땠겠습니까. 그러니 백자를 최고로 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고온에서 굽다 보니 점토의 수축이 커서 실패할 확률도 높다. 이처럼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 도자의 성형은 물론 건조, 소성 과정에서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현재 도예가 중 백자를 하는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으로 장씨는 분석했다.
백자 제작과정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좌절도 많이 했지만 얻은 것도 많다. 장씨는 이것이 결국 산교육이 돼 도예와 도예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됐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2010년 백자로 첫 전시를 열었습니다. 일곱 번째 개인전에서 백자를 처음 선보인 것이지요. 1년6개월을 투자해 달항아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거듭되는 실패로 포기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달항아리 50점을 만들었는데 겨우 2점만 남았으니 제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이럴 때 마을을 거닐고 산을 오르면서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다잡은 것이 제 작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후 3년 만인 지난 4월, 장씨는 동원화랑에서 백자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첫 전시 후 3년의 세월이 그의 작업세계를 더욱 폭넓게 하고 작업에 자신감도 붙게 했다.
“지난 전시보다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는 이야기가 많아 제가 작업하는 데 또 다른 큰 힘이 되지 싶습니다.”
그는 도예는 작가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작가의 힘은 단 50%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미술작품과 도예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이것 때문에 작업상 힘든 점도 있지만 그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무리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것을 가마에서 구울 때 실수를 하면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결국 불을 잘 다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부분이면서도 인간이 잘만 컨트롤하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도예의 매력입니다.”
그는 도자기를 불에 굽는 과정을 ‘불과의 대화와 교감’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단순히 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불과 소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단순한 도자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작가가 만든 작품 안에는 그 작가의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도예작품이 공장에서 만드는 단순한 공산품과 차별화되는 것이겠지요. 이런 철학이 들어 있는 만큼, 불에서 굽는 과정에서 작가와 불의 소통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불과의 소통은 곧 자연과의 소통이다. 불은 잘 건조시킨 나무를 태워 얻어지는 것이다. 나무를 건조하는 과정부터 불을 피워 온도를 올리는 과정까지 어느 한 군데도 정성이 없으면 안 된다. 이런 정성이 곧 소통의 바탕이 된다. 불과의 소통은 곧 나무와의 소통이고, 이는 나아가 자연과의 소통이다.
“불길이 1천300℃까지 오르면 불꽃의 색깔이 흰빛을 띠지요. 그 빛깔의 아름다움은 불과 나무, 곧 자연의 아름다움입니다. 1년에 서너 차례 가마에 불을 때는데 이때 도자기만 굽는 것이 아니라 제 속에 있는 무언가, 즉 세속의 잡념과 욕심 등도 태워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런 무욕의 상태가 곧 자연의 모습이 아닐까. 도자기를 굽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화시키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진정 자연인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