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회맹 - 대구의 임란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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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호국충의단 안에는 영남의병 315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
이 세상에 의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 많음을 아는데(此世知多死義身) / 여러 의병장과 함께 활과 돌로 미친 왜적을 쓸어버리리라(共將矢石掃狂塵) / 팔공산에서 군대가 쉬는 날 술잔을 들고(擧杯公岳軍休日) / 금호강 비 갠 나루에서 칼을 씻으리(洗琴湖霽後津) / 사악한 무리를 모름지기 속히 제거하고자(除去妖腰須欲速) / 힘찬 기운을 다시 새롭게 축적하네(畜來銳氣更如新) / 맹세의 피를 마시는 것은 남아가 할 일이요(盟盤血男兒事) / 성대의 많은 인재가 이런 사람 길렀구려(聖代菁莪養此人)
-대구 달서 출신 임란의병장 채선수의 한시(구본욱 위클리포유 대구GEO자문위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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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시 동구 지묘동 738-1번지에 최씨 의병장 삼현을 기리는 삼충비(三忠碑)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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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군 다사읍 연화산 자락에 대구 최초 임란의병장 임하 정사철과 그의 아들 낙애 정광천의 유허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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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종전 후 대구지역 사람의 영수인 낙재 서사원이 선사암 옛터에 완락당을 짓고 강론을 했다. 현재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다. |
대구지역에서는 임진왜란 발발 3개월 후인 7월6일(음력), 팔공산 부인사에서 최초로 의병을 결성했다. (1차회맹) 이듬해 계사년(1593)에는 181명이 모여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을 조직했다. 1596년 최동보, 서재겸, 최인, 손처약 등 영남지역 95명의 의병장이 팔공산에서 2차회맹(會盟)을 했다. 정유년(1597) 대구의병은 화왕산에서 3차회맹을 했다.
당시 대구의 의병장은 누구였으며, 어떤 역할을 했을까.
팔공산 부인사 1차회맹 때는 대구지역 유림지도층이 자발적으로 향병을 결성했다.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괴헌 곽재겸, 태암 이주 등 선비가 중심이 돼 조직했으며 향병대장으로 임하 정사철이 추대됐다. 이어 7월19일에는 초유사 김성일이 대구향병에 첩지를 보내 조직을 재편했다. 김성일은 대구가장(假將·임시의병장)에 무과급제 출신인 최계를 임명하고 서사원, 정사철에게 향병모집을 담당케 했다. 한편 박충후, 류요신, 채선행, 정여강, 이주에게 유사의 직책을 맡겼다.
임란 발발 3개월 뒤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첫 의병 결성
모두 세차례 ‘회맹’
1차 선비 중심 결성
향병대장에 정사철
실질 리더는 서사원
앞산서 활약 전계신
왜적 수백여명 목 베
日서 도쿠가와와 담판
조선인 포로 데려와
① 정사철, 정광천
임하 정사철은 동래정씨로 임란 당시 63세로 대구유림의 원로였다. 그는 선조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대구에서 한강 정구 등과 교류하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아들인 낙애 정광천도 부친을 따라 의병에 투신했으나 정사철은 1593년, 광천은 1594년에 잇따라 돌림병으로 사망했다. 현재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연화리에 1927년, 1995년, 2004년 건립한 부자(父子)유허비 등이 있다. 인근에는 또 두 선비를 기리는 금암서당이 있다.
정사철의 15세손 정한기씨(75)는 “두 선조께서는 임란 초기 대구의 향병지도자였다. 병이 들어 일찍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 더 큰 활약을 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② 서사원
정사철이 사망함으로써 의병대장에 오른 낙재 서사원은 대구유림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당시 42세였던 서사원은 수성현 의병대장 손처눌, 해안현 의병대장 곽재겸, 하빈현 의병대장 이종문 등과 함께 향병을 모집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렸다. 그 공을 인정받아 임란 중인 1595년 청안현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문반으로 직접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우기보다 군수조달과 둔전(屯田·군사적인 목적으로 쓰이는 토지) 관리에 힘썼다. 그가 임란 때 쓴 ‘낙재일기’에 대구와 인근 고을의 전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강서원과 이락서당, 완락당 등에 그의 발자취가 있다.
③ 손처눌, 손처약
모당 손처눌은 아우 오매정 손처약과 함께 의병에 투신했다. 서사원이 조모상을 당해 의병대장을 사직했을 때 손처눌이 대장을 맡았다. 정유재란 때 팔조령 인근 전투에 의병을 이끌고 참전해 왜군을 물리쳤다.
수령이 그 공을 조정에 알리려 했으나 “일개 서생으로 의병의 임무를 맡아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이라며 사양했다. 손처약은 최인, 최동보와 함께 경주의 문천(현 남천)회맹에 참가해 경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으며 1593년 문경 당교전투, 1597년 화왕산 전투에도 참전했다.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청호서원에 손처눌의 유허비와 위패가 있다.
④ 이주
태암 이주는 무태출신 선비다. 인천이씨로 임란 당시 36세였다. 향시에 합격해 생원, 진사가 되고 동당시(東堂試)에 장원을 했다. 임란이 일어난 후 1차 공산회맹 때 일부 주저하는 유림을 눈물로 설득해 창의를 주도했다. 1593년 손처눌이 부친상을 당해 의병대장을 맡았으며, 직접 격문을 지어 이웃고을에 전달하고 신녕 출신 의병대장 권응수 등과 함께 백안동에 진을 쳐 해안과 팔거(현 칠곡)를 점령한 왜구를 물리쳤다. 체찰사 이덕형이 그를 신뢰해 그로 하여금 서산의 둔전을 맡겼다. 그는 군량미를 조달하고 민생구휼에도 힘썼다.
이주는 대구시 북구 서변동 서계서원에 배향돼 있으며, 환성정 앞 배롱나무는 의병장 ‘이주 나무’로 지정돼 있다.
구본욱 자문위원은 “태암은 비교적 젊은 나이였음에도 유림 선배와의 교유가 두터웠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했다.
⑤ 최동보, 최인, 최계
대구의 임란의병장을 열거함에 있어 경주최씨 가문 3인을 빼놓을 수 없다. 우락재(優樂齋) 최동보는 최겸의 아들로 임란 당시 32세였다. 그는 중부 한천 최인(32), 숙부 태동 최계(25)와 함께 팔공산 일대와 경산, 하양, 경주, 화왕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면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그의 조부 최종옥은 임금을 호위하는 내금위 출신으로 무반집안이었다. 우락재일기에는 그가 이미 전쟁에 대비해 무쇠덩이 200근을 모으고 창과 검 300자루를 만드는 한편 800섬의 곡식을 모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스스로를 ‘대송(大松)장군’이라 칭하고 친척과 고을사람 70명을 모아 거병했다. 그의 거병에는 숙부 최계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락재 창의일기에 따르면 최동보는 곽재우가 거병한 4월22일(음력)에 반야월에서 진을 치고 왜군을 막았다. 또 이튿날에는 수십급의 왜적 머리를 베었다. 26일에는 해안현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해 화담(금호강 압로정 부근)에서 대파하고 창 50자루와 왜구가 노획한 보물을 탈취했다. 5월4일에는 경산 임당에서 노략질하는 왜군을 화공으로 습격해 창 27자루, 총 32자루, 말 12마리를 빼앗았다. 8월25일에는 경주 모량천 부근에서 군사 100명과 함께 왜군을 쳐 왜적의 머리 16두를 베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전투에도 참전했으며 그해 9월3일 권응수, 장몽기 등과 함께 대구부에 침략한 왜군을 물리쳤다. 또 10월에는 명나라 군대와 함께 무진에서 왜적을 격파하는 등 임진왜란 내내 전쟁터에서 풍찬노숙을 했다.
최동보의 숙부 최계는 임란 1년 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봉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최계는 초유사 김성일에 의해 대구지역 의병가장으로 활약한다. 그는 임진년 8월 해안(현 동촌)에 주둔한 왜장 평방희 진을 공격해 금호강 동촌부근에서 왜적 수십명을 수장시켰다. 그의 형 최인은 장몽기 등과 와룡, 화원에서 왜적을 막았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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