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경남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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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등축제의 고장답게 밤이면 남강변 진주성 촉석루 주변은 경관조명으로 인해 낮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컬러풀한 풍광을 뿜어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성안에 주민들이 살았는데 이젠 모두 정비돼 진주정신을 대표하는 호국공원으로 거듭났다. |
대구서 125㎞ 남짓 떨어진 경남 진주(晋州). 남강은 유독 진주 근처에서 더 혼신을 다해서 흘러가는 것 같다. 진양호를 빠져나온 남강은 직접 바다까지 내닫지 않는다. 함양 덕유산에서 186.3㎞를 굴러 함안군 대산면에서 낙동강한테 제 물길을 넘겨준다. 남강과 이심동체인 진주성. 경상 우도의 핵심 관아이자 진주의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블랙박스다. 그 상징적 누각인 촉석루와 객사에서는 연회가 빈발했다. 양반독점적 그 연회문화는 한양발 궁중연회와 쌍방향으로 소통된다. 그로 인해 진주관아는 물론 전주관아, 대구관아 등에서도 저마다 교자상 스타일의 한상차림 술안주 문화가 발흥하게 된다. 이 식문화는 훗날 일제강점기 갑종 조선요릿집으로 불렸던 ‘요정(料亭)’으로 대중화된다. 주머니 사정이 되면 누구나 맛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한식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진다. 진주성의 연회식은 그곳에 소속된 관기의 손길과도 맞물려 훗날 진주비빔밥, 진주교방음식, 진주헛제사밥, 진주냉면 등 진주음식문화의 골격을 형성하게 된다.
◆문화의 용광로…진주
‘팔색조’처럼 다양하게 벌어진 이 고장의 ‘문화근육’. 서로 통할 것 같지 않은 기질도 이상하리만치 진주에선 잘 융합된다. 하씨, 강씨, 정씨 등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姓氏)만 무려 80개. 진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1천년 남짓 영남 우도의 센터였다. 현재 경남의 웬만한 시·군은 모두 진주목 휘하였다.
진주의 유풍(儒風)도 엄청 짱짱하다. 그 유풍이 ‘진주정신’의 뇌관이다. 그 뇌관을 정착시킨 유학자가 퇴계 이황과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난 남명 조식. 한말 때 회봉 하겸진은 진주를 발판으로 영남 우도 유학의 한 축을 세웠다. 진주의 유풍은 포용력이 남달랐다. 백정신분해방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형평(衡平)운동’이 진주에서 발발했을 때 결코 그 흐름을 배척하지 않았다. 1894년 갑오년 칙령으로 평민이 된 백정. 겉으로는 평등했지만 관습적으로는 차별세상이었다. 화가 난 백정들은 신지식인 강상호(1887~1950)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지식인층은 그 당연한 호소를 수용해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한다. 199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창립되고 1996년에는 촉석루 앞에 형평탑까지 세운다. 그 백정들이 잡은 한우는 육회로 잘 갈무리돼 진주비빔밥의 정수리에 고명으로 얹히게 된다.
1862년 일어난 진주농민항쟁. 10여일 만에 끝났지만 30여년 뒤 동학농민운동의 촉매가 된다. ‘남존여비세상’이건만 진주는 여성의 꼿꼿한 행신에 대해선 제대로 평가해줬다. 일제강점기 경남권 최고 부호로 불렸던 만석꾼 정부인 김씨. 근검절약 습관이 몸에 배어 ‘꼼쟁이 할매’로 불린 그녀는 중앙시장에서 콩나물국밥을 팔아 큰돈을 번다. 콩나물을 국밥으로 요리해서 파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번 많은 재산을 장학사업 등에 쾌척했다. 고종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이례적으로 그 할매에게 ‘정부인’이란 작호를 내려준다. 정부인은 조선 때 정·종이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이다.
‘애수의 소야곡’으로 유명한 남인수. 그의 고향도 진주다. 그의 풍류는 진주의 대표 전래민요인 ‘진주난봉가’에서 발원한 건지도 모른다. 애수의 소야곡과 진주난봉가의 정조를 진주식 예술제로 승화시킨 진주의 대표적 명사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 지방 예술제의 효시가 되는 개천예술제를 만든 파성 설창수(1916~98)다. 그 예술제가 남강유등축제로 진화돼 갔다.
1966년 출간된 파성의 전집을 보면 진주비빔밥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파성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던 진주비빔밥을 공론화시켰다. 진주비빔밥을 ‘칠보화반(七寶花飯)’으로 제안한 것이다. 화반, 즉 ‘꽃밥’이다. 비빔밥이 얼마나 예뻤으면 꽃밥이라 했을까.
하지만 진주는 음식을 ‘문화관광식품’으로 보질 못했다. 자기 음식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을 덜 했다. 진주비빔밥은 오랫동안 지역민의 기억 속에서 망각됐다. 반면 역사가 일천한 전주비빔밥은 되레 한국 대표 비빔밥으로 등극한다. 90년대초 대한항공 기내식으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네 번이나 한국을 방문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까지 비빔밥을 먹고 엄지 척을 했다. 한국에 숱한 비빔밥이 있었건만 유독 전주비빔밥만 집중조명받는다. 조선왕조 궁중요리로 인간문화재가 된 전통요리 연구가 황혜성은 70년대 팔도 명물음식을 정리할 때 진주비빔밥 레시피를 정리해 발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마케팅 감각이 빠른 자의 몫이었다. 어느 날부터 비빔밥의 명가는 전주로 굳어진다. 진주로선 자존심 상할 일이었다. 이에 앞서 진주가 스타일을 구긴 사건이 또 터진다. 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가버린 것이다. 훗날 창원한테 또 밀리게 된다.
대구를 떠날 때 햇살이 다글다글 했는데 촉석루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드문드문 돋는다. 임진왜란 때 통곡이 버무려진 ‘애우(哀雨)’ 같았다. 수만명의 성내 민관군이 몰살당할 때도 비가 내렸다. 복원된 진주성 우물은 너무나 태연하게 좌정하고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 성내 민초들이 겨우 먹었을 그 주먹밥. 그 밥에 떨어졌을 피눈물(血淚). 어쩜 그게 꽃밥의 진면목인지도.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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