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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호랑이 연극배우 김헌근 "나는 호랑이로 빙의돼 산다"

2020-03-27

군부독재시절 폼나는 단어로 여긴 민족·전통
80년대 지역 대학가 상륙한 탈춤과 풍물 문화
'빨갱이' 분류된 연희판 멤버, 연극계서도 배척
88년 경북대 독문과 김창우 교수와 운명적 만남
한반도 버전 탈춤과 호흡한 내 맘속의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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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연극배우 김헌근은 1999년 경북대 독문과 김창우 교수의 권유로 이탈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의 대표작 '호랑이 이야기'를 민족극적 모노드라마로 녹여내면서 21년간 무려 450여 회의 공연을 지속해왔다. 그는 '연극판은 시대를 담아내는 용기'란 심정으로 경상도 사투리 사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원작을 각색해가면서 자기만의 호흡을 관객에게 선사하고 있다.

나는 호랑이 배우 김헌근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만사 접어두고 칠곡군 왜관읍 낙동강 변 집에서 세월을 낚으며 살고 있다. 덕분에 노모와 함께 밥 먹는 날이 많다. 노모는 코로나 사태를 두고 '이런 호환도 없다'면서 진저리를 치신다. 호환이라니? 연극판에서 한 청춘 보내온 내게 보내는 푸념 같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난 '어무이, 호랑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실은 인간이 더 무섭지. 코로나도 마찬가지 아잉교'라고 독백한다.

호환(虎患)! 그 대명사가 된 호랑이. 나는 왜 그를 금지옥엽인 양 끌어안고 '호랑이 배우'로 21년째 사는 건가.

1981년 경북대 임학과에 들어갔다. 난 그때 이미 무병 같은 연극병에 걸려 있었다. 당시 교내에는 연극반이 없었다. 차선책으로 찾아낸 동아리가 바로 탈춤반이다.

군부독재시절이었던 그 무렵, 이상하게 우리에겐 '민족·전통'이란 단어가 붙어야 폼이 났다. 굿, 소리, 풍물, 탈춤 등을 '전통 연희'라 불렀다. 우린 무대라 하지 않고 '판·마당'이라 했다. 국가보다 '민족'을 더 선호했다.

연희는 기존 연극보다 마당극 정신이 진했다. 그 중에서도 탈춤은 가장 풍자적이고 사회고발적이었다. 나는 81년 경북대 탈춤반 6대 멤버로 가입한다. 탈춤반(경북대 민속문화연구회) 전통은 경북대 76학번이었던 김사열·이균옥 선배 주도로 78년에 결성된다. 이후 두 선배가 촉매가 돼 지역 대학가 탈춤·풍물반이 85년 놀이패 '탈'로 재장전된다. 지역 대학가에 상륙한 첫 전통문화의 시그널이었다. 영남대는 농악, 계명대는 탈춤이 더 강했다.

탈 창립공연작은 김사열 작 '내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이었다. 이 작품은 기생관광, 종군위안부 등 굴곡진 한·일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경북대병원 근처 교육문화회관에서 공연했다. 신라 충신 박제상 이야기를 극으로 만든 것인데 난 여기에 막내 배우로 출연했다. 연출이 목표로 하는 등장인물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하던 때였다. 등장인물이 아니라 나를 연기하는 것에 불과했다.

당시 연희판 멤버는 거의 '빨갱이'로 분류됐다. 기존 연극협회조차 우릴 불순분자로 멀리했다. 우리도 기존 연극계와 선을 그었다.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혀 제대로 된 공연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공연하려면 대구시청 문화예술과의 심의필을 받아야만 했다. 결과는 늘 '공연불가'.

운명의 88년이 왔다. 그때 김창우 경북대 독문과 교수를 만난다. 그가 내 맘속에 호랑이를 집어 넣어주었다. 그는 내게 의식 있는 연극의 신지평을 연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본질을 알려준다. 이때 '소격효과(疏隔效果)'와 '서사극'이란 개념을 처음 터득한다. 다소 생소한 소격효과는 '낯설게 하기 효과'로 더 잘 알려진다. 서사극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내려온 기존 극작 기법에 반기를 든 것이다. 연극을 감상할 때의 보통의 태도(연극 무대에 대한 공감, 주인공에 대한 동화, 대리만족 등)를 단호히 부정한다.

김 교수는 당시 모두 쉬쉬하던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처음으로 민족극 버전으로 건드린다. 그 작품은 '이 땅은 니캉 내캉'. 브레히트적 색채가 다분했다. 나는 거기서 면서기 역할을 했다. 여느 연극과 궤를 달리했다. 스토리를 이끄는 해설자도 있었고, 학살사건 관련 육성증언, 영상, 슬라이드 등 다양한 오브제를 동원했다.

이 작품은 그해 서울 미리내극장에서 열린 '제1회 전국민족극한마당'에도 초청된다. 당시 안기부 직원들은 현장에서 대사를 일일이 체크했다. 하지만 다들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주의 극단 토박이의 '금희의 오월'에선 '전두환, 이 찢어 죽일 놈!'이란 격한 대사도 터져 나왔다.

나에 대한 김 교수의 애정은 구체적이었다. 후배 중 드물게 '배우 외길'의 의지를 확고하게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와 94년까지 호흡을 맞추며 매년 한 차례 공연을 올렸다. 난 점차 '연기자'에서 '쟁이'로 진화해 나갔다. 94년에는 동학운동 100주년을 맞아 '궁궁을을'(김창우 연출)을 올렸는데 이때는 1인5역을 했다. 이게 밑그림이 돼 호랑이 이야기로 옮겨갈 수 있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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