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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탈춤사위 품고 꽃피운 1人 모노극 '호랑이 이야기'…코로나 잡히면 더 세질 듯

2020-03-27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호랑이 연극배우 김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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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경북대 민속문제연구회. 일명 탈춤반 6기 멤버로 연극배우의 삶을 시작한 김헌근은 민족연희의 척추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는 한반도 여러 버전의 탈춤사위를 몸에 품었다.
호랑이 배우로 가기 전 내게는 '간이역' 같은 시절이 있었다. 1990년 처음 오픈한 '예술마당 솔'의 인프라 구축에 힘을 보탠 것이다. 95년부터 99년까지 나는 사무국장을 지냈다.

이 공간은 시대적 울화증을 삭이는 일종의 '문화 굿판'이었다. 당시 말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는 가톨릭문화관, 가톨릭노동자회관 등에 기대던 때였다. 나는 솔 회원 모집에 올인했다. 그리고 판화가 오윤 회고전 및 유홍준 교수와 손을 잡고 한국미술사 강의 및 문화유산답사 등을 이어갔다. 초대 사무국장이었던 도진용은 남달랐다. 계명대 탈춤반 출신으로 나와 달리 민요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는데 창립 준비 때문에 몸을 너무 혹사하는 바람에 요절하고 만다. 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꿈결 같은 친구다. 모두들 덕분에 제3회 전국민족극한마당이 솔 주도로 대구에서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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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예술마당 솔'에서 전시회를 가진 탈 조각가 이석금의 '무구무애'란 작품. 김헌근은 천진난만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품은 듯한 이 조각품이 꼭 빙의된 호랑이 같다는 생각때문에 현재까지 마스코트처럼 애지중지하고 있다.
호랑이와의 친견
中 구전 경험 伊 극작가 의해 각본 완성
병사·마을주민·군인 1인 10역도 소화
21년 넘어온 세월 450여회 호랑이 변신


공연이 뜸해졌다. 그걸 불안하게 여긴 김창우 교수. 그가 어느 날 의미심장한 대본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의 극작자 다리오 포의 작품(호랑이 이야기)이었다. 중국 상하이 근방 어느 지역의 구전 스토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동작을 섞어 이야기하는 여러 연희가 있다. 중국으로 여행 간 다리오 포가 그걸 보고 이탈리아식 '뻥'을 섞어 각본을 완성한다. 김 교수도 그 공연을 독일에서 보았고 그 판본을 내가 적임자다 싶어 경상도식 사투리를 섞어 마당극 양식으로 엮어냈다.

중국 대장정에 참가한 한 중국 병사가 부상을 입고 혼자 헤매던 중 폭우를 피하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간다. 폭우로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못해 젖이 퉁퉁 부은 어미 호랑이가 있었다. 병사는 어미 젖을 빨아주고 호랑이는 병사의 상처 부위를 핥아준다. 마을로 내려온 호랑이와 병사는 주민들과 힘을 합쳐 국민군과 일본군을 연이어 물리친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 관료들은 '호랑이는 변증법을 모름으로 산으로 돌려 보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병사와 마을 주민들은 기지를 발휘,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합심 저항한다는 얘기다. 많은 걸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과연 호랑이로 변신할 수 있을까? 두 달여 대본을 외우면서 자문자답해 본다. 김 교수와 나는 경주의 한 폐교에 들어선 새벽문화학교에 배수진을 쳤다. 합숙연습에 들어갔다. 그런데 감정이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짜 호랑이를 본 적이 없는 탓이다. 일단 달성공원에 가봤다. 그 호랑이는 기가 차게도 너무나 길들어 풀을 먹고 있었다. 실망하던 차 한 TV에서 호랑이 관련 다큐물을 보게 된다. 덕분에 시베리아 호랑이의 야성과 포효를 어느 정도 카피할 수 있었다.

99년 6월 예술마당 솔에서 초연을 올렸다. 1시간50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다. 나쁜 반응은 아니었지만 내 연기는 그냥 연기에 불과했다. 호랑이스러움을 위해 제주도 갈옷을 입었다. 막이 열리면 설레발치는 만담꾼 같은 해설자로 변했다가 이내 중국 병사와 호랑이 사이를 오가야만 했다. 마을사람, 일본군, 국민군, 중국 당 관료…. 숨 가쁘게 1인10역을 소화해야만 했다.

그동안 450번 정도 호랑이가 돼 봤다. 할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그간 세상사도 많이 달라졌다. 삐삐 운운하던 시절이 어느새 스마트폰 시대로 건너갔다. 군부독재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환경(원자력발전소와 4대강), 비정규직, 청년백수, 촛불, 갑질, 미투사건 등이 들이쳤다. 연극판은 뮤지컬과 영화판에 사면초가 형국이었다. K-pop의 백미를 장식한 방탄소년단이 세계 음악시장의 1인자로 등극하기도 했다. 그사이 두 명의 대통령이 감옥에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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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집 앞에서 만난 길고양이를 반려묘로 키우고 있는 연극배우 김헌근.
달라진 세상&달라진 대본
이동식 무대·경상도 사투리 원작 각색
가장 무서운 호랑이와 함께 사는 인간
10년차 무렵, 공존하는 유토피아 희망

세상이 달라지니 호랑이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문제가 된 건 '변증법'이란 단어. 당 관료가 언급한 그 변증법. 세상을 움직이는 그 '정반합(正反合)'. 가장 무서운 호랑이가 인간과 일심동체로 산다는 것, 그게 정반합의 요체 아니겠는가. 갑과 을의 소통과 공존처럼. 치고받으면서 사물은 진화한다는 그 변증법, 말은 쉬워도 정작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관객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체 단어로 '국가보안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찮았다.

중국 병사는 뒤에 독립군으로 바뀐다. 마지막 광복군! 바로 '장정(長征)'의 주인공 김준엽을 염두에 둔 것이다. 기존 무대도 너무 무겁고 고루하게 보여서 이동식으로 교체한다. 말투는 경상도 사투리였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해설자 행색도 초창기와 달라진다. 예전 가가호호 방문해 구수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맥고모자 쓴 보따리장사꾼 스타일이었다.

10년 차 호랑이로 넘어서면서 나는 용맹하고 강인한 기상의 호랑이에서 벗어났다. 빈부격차와 계층 간 문턱을 무너뜨리는 사회운동가적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단순한 저항을 넘어선 모든 진영이 가진 차이와 다름이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공존하는 유토피아를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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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왜관읍 자신의 집 앞 폐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헌근 배우. 가장 낮고 가장 피폐한 곳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가장 빛난다고 믿는다.
연기에 한 축이 된 탈춤
깨끼춤·덧뵈기춤·강녕탈춤 등 섭렵
조선사회 멋스러움 자연스럽게 습득
새로운 연극쟁이와 순회공연도 가져


격렬한 호랑이 연기. 대학교 때 미친 듯 섭렵해나갔던 3가지 탈춤이 크게 도움이 됐다. '깨끼춤'이 인상적인 중부권 탈춤인 양주별산대, '덧뵈기춤'이 인상적인 경남 사천 지역의 가산오광대, 도약 동작이 많은 북부지방의 강녕탈춤을 판소리 동·서편제처럼 익혔다. 동작을 발라낼수록 그동안 잘 몰랐던 지난 시절 조선사회의 멋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2003년 예술마당 솔에서 펴낸 오주석의 명저 '한국의 미'란 책도 엄청 도움이 됐다. 하지만 재주가 없어서 민요와 우리의 소리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 늘 아쉬움이 남는다.

호랑이 덕분에 94년 민족극협회가 주는 '민족 광대상'을 수상한다. 그래 광대상이라서 너무 기뻤다.

사철 호랑이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틈틈이 새로운 연극쟁이, 그리고 경남 진주 극단 '현장' 같은 지방 극단과도 손을 잡았다. 나처럼 새로운 모노드라마의 신기원을 열어간 '염쟁이 유씨'의 배우 유순웅과는 팔자도 비슷해 너무 죽이 잘 맞았다. 염쟁이 그 작품은 대전 출신 작가 김인경이 그를 위해 맞춤식으로 만들고 위성신이 연출했다. 충북 청주 출신인 유순웅은 그 작품으로 떴다. 2004년부터 서울 대학로에서 대박을 내고 전국순회를 가졌다. 그런 유순웅과 2인극 '만두와 깔창'을 위해 성균관대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놓고 맹연습을 했다. 연출은 김명곤 전 문체부 장관이 맡았다. 이 작품은 영화제작에 나서는 시장 상인의 이야기로 반응이 좋아 전국순회도 했다.

2000년부터는 창작스튜디오 스타일의 성주 금수문화예술마을 최재우 촌장과 의기투합을 하고 거기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그곳은 제2의 호랑이 연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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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로 빙의돼 열연 중인 배우 김헌근.

1인극 계보를 찾아서
1인극 역사 주름 잡은 추송웅·김시라
3기 접어든 호랑이 이야기 또다른 도약
소통·인정보다 저항 의식 절실한 시절


모든 캐릭터를 혼자서 다 감당하는 1인극 모노드라마. 연기자라면 한 번쯤 그걸 꿈꾸겠지만 무슨 지랄 맞은 팔자가 아니라면 언감생심이란 생각이다. 국내 1인극 역사를 주름잡은 두 선배 배우를 난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추송웅(1941~1985)과 김시라(본명 김천동, 1945~2001). 모노드라마 공연 1천 회를 돌파한 추송웅의 대표작은 당연히 '빨간 피터의 고백'(1977). 공연 4개월 만에 6만 명, 작고할 때까지 482차례 공연해서 모두 15만2천여 명의 관객을 불러 앉히며 미증유의 인기몰이를 했다. 1인 6역을 감당한 그의 '우리들의 광대' 역시 24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쟁이 혹은 광대? 그들은 엔터테이너가 아니다. 요즘 TV오디션 프로그램에 '광대는 절대 오디션을 통해 발굴할 수 없다'란 말을 해주고 싶다.

가장 중요한 대사가 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사람 말이든 짐승 소리든 맘 열고 귀 기울여 들어보면 뭐라카는지 다 안다'. 말하기 전에 먼저 경청해보라. 허나 갈수록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인 것 같다. 그래서 내 호랑이 이야기도 중단될 수가 없다.

어느새 호랑이 이야기가 3기로 접어들었다. 이 코로나 정국이 끝나면 내 호랑이는 또 달라질 것이다. 나의 멘토랄 수 있는 김 교수는 날 볼 때마다 '소통과 인정보다 부정과 저항의식이 더 절실한 시절'이라면서 '더 세게'를 강조한다.

내 거처는 98년부터 왜관읍 낙동강변으로 옮겨져 온다. 처부모의 집인데 내가 2층을 빌려 쓰고 있다.

예순이 가까워지니 모든 사람이 다 호랑이로 보인다. 자본에서 자꾸 멀어지고 있는 쟁이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아내 또한 그렇다.

코로나의 바람이 불고 있는 낙동강변에 섰다. 억센 봄바람의 결이 호랑이털 같다. 누구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를 위해 다시 호랑이 춤을 실처럼 풀어본다. '코로나 진혼굿'이라 여기면서.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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