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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n번방'과 악의 평범성

20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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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악(惡)해질 수 있을까.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 해도 'n번방'사건은 경악을 넘어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끼게 한 사건이다. 국민 감정은 비슷한지 코로나19가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잠식해버리는 와중에도 'n번방'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은 식을 줄 모르고 들끓고 있다. 주범인 조주빈이 잡혀 신상이 공개되자 오히려 불법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 유포한 자뿐만 아니라 이를 소비한 남성들까지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피해자 중에는 미성년자도 최소 74명이나 포함돼 있으며 해당 성착취 영상물을 감상하고 범죄 행위를 묵인한 남성들이 26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인간이길 포기한 한두 명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여기에 적극 가담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상식과 도덕성을 저버리는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소환되는 이론이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그것이다.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이 열리자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특급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해 책을 펴낸다. 사람들은 그를 악마나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법정에 선 그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나약하고 평범했다. 아렌트는 이에 근거해 '악이란 악마의 작품이 아닌 평범한 인간 개인의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평범하고 성실해 보이기까지 한 인물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유 불능성'에 있다. 실제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은 국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죄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에게 생각하지 않음, 곧 '사유 불능성'의 죄가 있다고 말한다.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큰 집단의 규칙에 무비판적으로 마비돼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을 때 악은 곧 '평범한 일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n번방'사건도 텔레그램에 자신들만의 운영체계를 구축해 놓았다. 비용에 따라 철저히 계급을 나누었고, 피해자들의 신상정보를 알아낸 뒤 노예처럼 굴도록 협박했으며, 참가자들에게도 특정한 룰과 행동양식을 요구하는 집단적인 규칙을 설정해 놓은 것이다. n번방에서는 학보사 편집장을 거치고 봉사활동을 해온 20대 청년이 그 세계를 지배하는 '박사'로 군림하고, 일상 세계의 젊은 공무원은 운영진이 돼 활동하며, 공익근무요원은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불법적으로 취득해 넘겨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피해자의 고통 속에 불법적으로 제작된 영상물을 수많은 평범한 남성들이 클릭 한 번으로 공유한다. 이 세계에서 여성은 돈만 내면 학대하고 능욕해도 되는 물건 같은 존재이지 동일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다. '박사'를 비롯한 참가자 모두가 한 톨의 죄의식도 가지지 않은 가해자인 것이다. 내 아이를 진료해주는 소아과 의사가, 내 자녀를 가르치는 학교 교사가,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경찰이 자신의 방에서는 남몰래 영상물을 다운받고 변태적인 주문을 내뱉으며 낄낄거릴지 모른다는 상상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대학생 2명이 만든 추적단 '불꽃'이 할 수 있는 일을 정부는 그동안 무얼 했는가라는 비난도, 국회청원 1호인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을 졸속 처리한 의원들의 무능함도, 시대를 읽지 못하고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 한결같이 낮은 형량을 선고한 사법부에 대한 비판까지 도대체 대한민국 3권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이제는 답을 내놓아야 할 차례다.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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