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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정문태의 제3의 눈] 노 우먼, 노 크라이!

2020-11-27

가정폭력 숨기는 태국 여성
시민 95%는 목격해도 방관
여성폭력은 전 지구적 문제
코로나 후 폭발적으로 늘어
해결 방안 함께 모색해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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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 전문기자

지난 25일 아침나절, 치앙마이를 찾은 외신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길이었다. 동네가 웅성댔다. 낯익은 할머니 네댓이 눈물범벅인 한 새댁을 달래는 터라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어정쩡하니 걸음을 멈췄다. 신발도 안 신고 뛰쳐나온 새댁이 겁에 질린 걸로 봐서 굳이 사정을 묻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30년 동안 타이(泰國)에 살면서 두어 번밖에 본 적 없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건 타이에서 가정폭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중하게 여기는 이른바 '나'(얼굴), 우리말로 체면쯤 될법한 관습에 가려왔다는 뜻이다.

'가정폭력저널'에 따르면 68%에 이르는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이 휘두른 가정폭력을 경험한 타이 사회에서 바깥으로 도움을 청하는 여성이 20%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눈에 안 띌 뿐 한집 건너 한집에서 가정폭력이 벌어지는 셈이다. 게다가 여·남성진보운동재단은 타이 시민 가운데 95%가 남의 가정폭력을 못 본 체한다는 비정한 현실을 고발했다. "지금 끼어들면 나중에 화해했을 때 개가 된다." 타이 사람들 사이에 나도는 이 말이 그 증거다. 올 1월부터 지난 7월까지 신문 헤드라인에 걸렸던 가정폭력만도 367건이었고 그 가운데 자그마치 242건이 죽음으로 이어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

타이 사회가 지닌 가정폭력의 뿌리는 두 갈래로 따져볼 만하다. 하나는 불교국가인 타이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천한 업보'로 낮잡아 보는 종교적 불평등이다. 다른 하나는 남편을 위해 상냥하고 순수하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가르쳐온 전통 가족관이다. 그러니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여성이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으로 굳어졌다. 하여 19세기까지만 해도 타이에서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등록되었을 정도다.

여성폭력은 전 지구적 문제다. 유엔여성기구(UN Women)는 여성 35%가 육체적· 성적 학대를 당했고, 137명이 나날이 가정폭력으로 죽임당하고, 2017년 한 해만도 여성 8만7천명이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지난해 2억4천300만 여성이 친밀한 남성한테 육체적·성적 폭력을 당했다고도 한다.

유엔여성기구에 따르면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성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아프리카에서는 성폭력이 급증했고, 브라질과 멕시코 등 남미에서는 여성살해 사건이 크게 늘어났다. 코로나19로 세계 각국 시민사회가 움츠러지면서 무엇보다 가정폭력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에 견줘 올 9월까지 가정폭력은 아르헨티나에서 25%, 프랑스에서 30%, 싱가포르에서 33%나 불어났다고 한다. 온 세상 여성이 세기적 유행병 속에서 가정폭력이라는 '그림자 유행병'까지 겪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밝힌 2020년 성차별 지수에서 153개국 가운데 108위를 차지한 대한민국의 여성은 안녕하신지 못내 걱정스러운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동네 새댁이 남편한테 맞은 2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이었다. 고백컨대, 나도 이 칼럼을 쓰면서야 그 날짜를 더듬어냈다. 잠재적 가해자인 남자로 살아온 탓이다. "혹시 다친 데 있으면 병원 갑시다"라고 하며 입 발린 소리만 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뜬 지난 수요일이 자꾸 가슴에 사무친다. 가정폭력을 보고도 못 본 체 넘긴 나도 결국 95% 타이 시민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으니. "노 우먼, 노 크라이"(No Women, No Cry), 노랫말이 아니라 인류사의 숙제다. 오늘 남성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봐야 할 중대한 화두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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