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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인동장씨와 인동작변

2020-11-27

감옥서 태어난 장석규, 한양에 아들 보내 조부·부친의 恨 풀어

경상감영관풍루1
어머니 김해배씨가 아들 장석규를 낳았던 경상감영.달성공원으로 이전하기 전 경상감영의 관풍루. 〈영남일보 DB〉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승하해 나라가 어수선할 무렵, 경상도 인동고을(현 구미시 인동)에서는 부사 이갑회가 부친 생일잔치를 벌이면서 지역 유력 사족인 인동장씨 장윤혁을 초대했는데 장윤혁은 국상중이라 참석을 거절하고 잔치음식마저 돌려보낸다.

수모를 당한 괘씸함과 국상중에 잔치를 벌려 난처하게 된 인동부사는 아전과 짜고 간계를 꾸며 달포 뒤 추석날 장윤혁 집 뒤뜰에 소머리를 던져놓고 인산(因山·국상) 전에 소를 도축했다는 혐의를 씌워 집안 노비를 잡아가자 집안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 항의하면서 이속들과 충돌하게 되었다고 인동장씨 문중에서 이야기한다.

인동부사가 경상감영을 통해 조정으로 올린 장계에는 인동장씨 장시경·시욱·시호 삼형제 주동으로 집안노비 60여 명이 추석 당일 관아를 침범해 무기와 군량을 탈취하려 했고 이들은 서울로 가서 선왕을 독살한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관병의 적극적인 제지로 뿔뿔이 도망 가서 주모자 삼형제는 낙동강변의 천생산 낙수암에서 투신해 둘은 죽고 셋째 장시호만 살아남았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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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 시조인 장금용의 위패를 모신 구미시 옥산동 옥산사 전경.

◆멸문의 화를 당하고

조정은 형조판서 이서구를 안핵사로 내려 보냈고 한 달간 조사를 마친 뒤 안핵사와 경상감사가 올린 보고서에는 이 사건을 정조 독살설 유포에 따른 장시경 모반사건으로 결론지었다. 당시 섭정인 정순왕후는 추석날 저녁 몇 시간의 난리였고 대나무 막대기가 무기의 전부인 점, 동조세력이 없는 점을 들어 모반사건으로 볼 수 없다고 했으나 영의정 심환지는 선왕 국상을 앞둔 어수선한 시기에 본보기를 삼아야 한다면서 엄벌을 주장했다.

보고서 전문이 순조실록에 수록돼 있는데 문초 사실만 잡다하게 나열되었을 뿐 모반 내용은 매우 허황했다. 고을 수령과 재지사족 간 단순한 충돌을 집권 노론벽파가 정치적 술수를 꾸며 엄청난 역모로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정조가 발탁해 국정동반자로 삼았던 개혁세력의 기세가 일시에 꺾여버렸고 어렵게 중앙으로 진출한 영남출신 관리들도 대거 낙향한다.


정조 승하 국상 치를 무렵
경상 인동고을 부사 이갑회
인동장씨 장윤혁 잔치 초대
장윤혁이 음식 돌려보내자
괘씸함에 역적으로 몰아가
장윤혁의 아들 삼형제 죽고
장시호 처 김해 배씨는 투옥



살아남은 장시호는 참형에 처해졌고, 친부 장윤혁은 경상감영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옥사했으며, 역모 연좌죄로 집안 형제와 가솔 삼십여 명이 경상감영에 수감되거나 평안도 강계, 함경도 안변, 전라도 낙안, 남해 완도군 신지도로 유배되었으며 사돈인 안동 무실류씨 집안까지 불똥이 튀었다.

주동자의 백부이자 여헌 장현광의 7대 종손인 장윤종은 남원으로 유배돼 이듬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성리학의 유종(儒宗)이요 증직(사후추증) 벼슬이 영의정이고 문강(文康) 시호가 내려진 영예로운 집안, 인동장씨 여헌문중은 멸문지화의 참화를 당했고 인동고을은 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이 1800년 순조 즉위년에 인동에서 일어난 변란 '인동작변(仁同作變)'이다.

◆신지도의 한(恨)

사건이 발생한 지 십년이 흘러 경상감영에서 십년 옥살이하던 사촌 네 명이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억울한 이야기라 꺼내기가 조심스러웠고 점차 인동작변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졌다. 순조가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지만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이들에게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이들 신원은 조정의 대사면령에도 불구하고 해배되지 못했다.

전라도 신지도에서 모진 생을 이어가던 장석규는 고향 인동에서도 조정에서도 잊힌 인물이었다. 아버지 장시호는 모반사건의 대역 죄인으로 처형당했고 어머니 김해 배씨는 그해 9월5일 경상감영 감옥에서 장석규를 낳았다. 태어난 지 45일 만에 어머니 김해 배씨 품에서 누이 둘과 어린 형 장석범과 함께 남해 신지도로 유배를 갔다. 달포 산모의 귀양길은 남도 천리길이었다. 절해고도 귀양살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첫째 장시경 처 양주조씨는 삼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셋째 장시호 처 김해 배씨만 혼자 살아남아 독하게 아이들을 키운다.

김해 배씨는 언문소학으로 아들과 딸을 가르치며 화변은 무고이고 조작이니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면서 네가 자라서 하늘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한을 풀어 드리면 내가 죽어서 눈을 감으리라고 어린 자식들에게 살아 남아야 할 이유와 억울함을 끊임없이 심어 주었다.

장석규가 열 살이 되는 해 강진고을 관속 무리가 밤중에 집안으로 침입해 겁탈하려 하자 어머니와 열일곱살 큰누이는 뒷문을 열고 도망가 바다 절벽 아래로 투신한다. 그 참혹한 현장을 보면서 어린 형제들은 피눈물을 삼키며 목숨을 이어간다.

◆격쟁으로 마침내 신원이 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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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남유학의 신지평을 열었던 여헌 장현광의 영정.

절해고도에서 열 살에 어머니를 잃은 장석규는 어렵게 글을 익힌다. 역적 자식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마을 훈장의 굴욕을 참아가며 모르는 글자는 길가는 행인에게 물어가면서 학문을 깨우친다. 신지도는 조선시대 단골 유배지로 도처에 귀양 온 사대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세보, 김성탁, 이광사 등이 유배를 왔던 곳으로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들에게 선비의 기초를 닦고 가정을 이루었다.

그의 나이 31세 되던 1831년에 처음으로 고향 인동을 찾아갔다. 강보에 쌓인 채 신지도로 귀양 가서 삼십년이 지나 처음으로 방문한 고향이지만 이미 오십 줄이 훨씬 넘은 고향 친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지난날 십년을 감옥살이한 당숙들에게 유배지를 벗어나 고향마을에 온 초면의 조카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또 다른 불똥이 옮겨오지 않을까 침묵을 지키라는 훈계뿐이었다.


경상감영 감옥서 난 장석규
열살에 어머니·큰누이 잃어
역적 낙인 찍힌 채로 살면서
죄인이라 유배지 못벗어나고
아들 장기원이 한양서 '격쟁'
60년만에 인동장씨일가 해배



장석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전라도 절해고도로 귀양 온 서울의 노론관리들에게 매달렸다. 고금도로 귀양 온 전주이씨 판서 이기연과 신지도로 귀양 온 해평윤씨 승지 윤치영이 그들이었다. 이미 조정에 씨가 말라버린 남인들은 더 이상 귀양 오는 이들이 없었다.

국왕에게 직접 신원을 구하기 위해서는 본가의 본원사실과 대구감영의 심문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1843년 다시 고향을 방문해 대구감영 기록을 확인하는데 진력했으며 1844년 마침내 심문기록을 베껴 올 수 있었다.

아직 죄인 신분인 장석규는 신지도를 벗어나 서울로 갈 수 없으므로 해배돼 서울로 가는 윤치영에게 15세 난 장남 장기원을 딸려 보내 신원을 호소하게 했다.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윤치영은 선조 때 재상 윤두수 후손으로 본관이 선산 해평이다. 해평은 인동의 이웃 고을로 선조가 이웃에 살았기에 아무래도 살갑게 대해 준 모양이다.

윤치영의 도움으로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장기원은 1852년부터 칠년에 걸쳐 임금이 행차하는 길목에서 '격쟁(擊錚)'을 통해 조상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격쟁이란 원통한 일이 있는 백성이 임금의 거동 때 하소연하려고 꽹과리를 쳐서 알리고 임금의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일을 말한다.

국왕인 강화도령 철종은 국정에 관심이 없는 허수아비였고 국구(왕의 장인)인 김문근이 실권을 장악한 안동김씨 세도였다. 1858년 인동장씨 참봉 장석봉으로부터 사건 보고를 받은 김문근이 관심을 보이고 예조판서 강시영이 김문근에게 인동작변에 대해 언급을 했다. '대체로 이 일(인동작변)은 본래부터 허황된 옥사였다는 것을 영남만이 아는 것이 아니고 온 조정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나이가 어려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사건을 끌어 왔던 것입니다.'

1859년 의금부에서 재심리가 열리고 1861년 2월에 마침내 해배됐다. 사건이 발생되고 60년이 지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신원이 비로소 이루어졌고 적몰되었던 집과 토지는 반환되었으며 인동 관아에 귀속되었던 장윤혁의 별당 청전당도 집안으로 넘어왔다.

◆연미정 실기에 한많은 사연을 남기고

인동작변이 일어난 지 한 갑자 세월이 흘러 조상의 한은 풀리고 강보에 쌓여 절해고도로 귀양 온 아이는 환갑을 넘겼다. 조정도 문중도 오래전에 그를 버리고 잊었지만 어머니의 당부를 가슴에 품고 자신과 싸워 승리를 거둔 조선 선비의 기개였다.

상복을 입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45세 되던 해부터 장석규는 삼년 동안 상복을 입었으며 밤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부모의 신원을 위해 간절히 기원했다. 좋은 음식과 따뜻한 이불을 멀리하고 죄인으로 자처했다.

아들 장기원이 조정의 공식 해배문서를 가지고 온 이후 장석규는 병이 악화돼 61세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지친 한평생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리운 부모님을 찾아 서천으로 빨리 가고팠던 탓일까. 생전에 그토록 살고 싶었던 고향 인동 땅에 살아 보지 못하고 죽어서 어머니·누이의 넋과 함께 문중 선산에 묻혔다.

오늘날 신지대교로 인해 육지와 연결돼 절해고도란 말이 무색하지만 섬 유배지에서 열 살 소년이 독학으로 학문을 익혀 조상의 억울함을 푼 한많은 사연을 그의 저서 '연미정실기'에 남겼고, 이웃 강진고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약용은 바람결에 들려오는 모녀 이야기를 듣고 여유당전서에 '고금도 장씨녀 자사'란 글을 남겼다. 신지도를 고금도로 잘못 안 듯하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은 같은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 참봉 장석봉에게 글을 배운 인연이 있어 그에 의해 집안의 억울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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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에 신지도에서 서울로 올라 와 창덕궁 골목에서 꽹과리를 치면서 격쟁으로 조상의 신원을 구한 장기원은 고향에 다시 일가를 일구었다. 김성우의 논문 '인동작변을 둘러싼 다중의 시선들'을 참고해 재구성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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