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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김상봉의 신파와 미학 사이] 영상 예술과 건축의 문제

2022-06-28

드라마의 미적 가치 완성하는
무대와 건축물의 중요성 증대
건축은 사물 통해 나타난 정신
'나의…' 화면 속 남루한 공간
인간의 상처와 슬픔 뛰어넘어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 제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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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여러 해 전에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도쿄대학에서 세미나 발표를 마치고 하루 이틀 남는 시간에 도쿄의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인 데다가 내가 그림에 조예가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기억에 남는 그림은 거의 없는데, 그때 읽었던 해설 하나가 내내 잊히지 않는다. 화가의 이름은 잊었는데, 아무튼 그때 전시되었던 그림을 그린 어떤 화가는 일본의 개화기에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림을 그리면서 유럽의 석조 건물에 비하면 대부분 목조건물인 일본 건축물의 가벼움 때문에 몹시 번민했다고 한다. 까닭인즉 건물의 가벼움 때문에 도시 풍경을 그린 그림까지 가벼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드라마의 줄거리, 주인공의 성격, 극이 품고 있는 사상 외에도 다듬어진 대사와 음악과 무대장경을 드라마의 여섯 가지 구성요소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드라마는 시와 음악과 미술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셈인데, 특히 무대 장경이라는 요소를 생각하면 드라마의 미적 가치를 위해서는 무대 자체도 아름다워야 함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드라마는 지금 기준으로는 연극이지만, 영상 예술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드라마의 아름다움은 화면 자체의 영상미와 분리될 수 없다. 카메라가 비추는 대상의 아름다움은 그 대상을 재현하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규정한다. 가벼운 건물을 아무리 잘 그려도 그림이 육중한 무게를 가질 수 없듯이, 누추한 공간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재현하더라도 그것을 재현한 영상이 심미적 가치를 가지기는 어렵다.

물론 드라마가 재현하려는 대상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삶은 허공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삶이 일어나는 공간은 건축물에 의해 채워져 있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드라마는 원하든 원치 않든 건축물을 영상 속에서 재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축물이 아름다우면 전체 영상도 아름다워지고, 건물들이 누추하면 영상도 누추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한국의 영상 예술가들은 불리한 자리에 서 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사람들의 삶이 일어나는 거리와 공간은 그리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고궁이나 절집 같은 예외가 아니라면, 한국에서 아름다운 건물들 때문에 걷고 싶은 거리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헤겔의 '미학강의'에서 건축은 예술사의 첫 단계에 등장하는데, 이는 사람이 집을 아름답게 짓고 꾸미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움에 눈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나라에서 현대식 건물은 대부분 예술과는 무관한 부동산이다. 사치스러운 아파트는 많아도 아름다운 건물을 만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나라에서, 그런 거리를 배경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찍어야 하는 것이 이 땅의 영상 예술가들의 숙명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았다. 거기서 보이는 거리와 건물 중에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세트장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풍경은 모두 친숙했다. 그러나 영상 속에 보이는 어떤 건물도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붙잡지는 않았다. 한쪽에는 박동훈이 속한 공간이 있다. 그가 거주하는 아파트와 그가 일하는 대기업 빌딩은 아무 성격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사치스러울 수는 있어도, 아름답지는 않다. 그와 정반대의 공간에는 참을 수 없이 남루하고 누추한 이지안이 사는 집이 있다. 그녀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손님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몰래 비닐봉지에 담아 와, 어두운 방에서 믹스커피와 같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도 그 장면이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예술가는 그런 누추한 공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또, 아무 아름다울 것도, 숭고할 것도 없는 그런 영상을 무엇을 위해 보고 있는 것일까?

한국의 드라마가 인간 내면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집요한 탐구라는 것은 이제 일종의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내면의 상처와 슬픔을 어떻게 화면 속에 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마음의 슬픔 그 자체는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슬픈 음악은 많아도, 슬픈 그림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낯선 낱말이다. 인간의 슬픔을 감각하기에는 시각은 너무도 무딘 감각이다. 그런즉 슬픔은 화폭에 담기 어렵다. 화면인들 다르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아저씨'의 화면에 비치는 남루하고 누추한 공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지안이 지하철에서 내려 올라오던 어두운 골목길, 유독 흉가처럼 을씨년스러운 집,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주지 못하는 대문, 그리고 서양 영화였더라면 하녀가 사는 방보다 못했을 누추한 방 그리고 그 방 안의 남루한 세간살이는 지안의 황폐한 내면 풍경의 외적 현시이다. 그런 공간에서는 아무런 대사가 없어도, 풍경과 건물과 그 속의 남루한 사물들이 사람 대신 말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말보다도 더 절실한 그 내면의 소리를 알아듣고 한 인간의 켜켜이 쌓인 마음의 상처와 슬픔에 공감하게 된다.

생각하면, 이처럼 누추하고 남루한 공간이 인간의 내면을 외적으로 현시하는 것은 서양의 예술가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한국 영상 예술의 두드러진 개성이다. 왜냐하면 서양에는 그런 집과 거리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서양의 건축이나 거리 풍경은 대부분 인간의 슬픔을 외적으로 현시하기에 너무도 훌륭하고 아름답다. 서양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심지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풍경조차도 장엄하고 숭고하다. 파괴된 건물조차 아름답고 숭고한 건축에 대한 추억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영화인들은 화면에 비치는 거리와 건물의 도움 없이, 어떤 공간에서 인간의 슬픔을 현시할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서양의 영상 예술가들이 불쌍해진다.

한국의 현대 예술은 분야를 막론하고 어떤 가난의 미학을 내장하고 있다. 슬픔이 삶의 안쪽이라면, 가난은 삶의 바깥이다. 그 바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건축이다. 건축은 사물로 나타난 정신이다. 건물은 정신의 허영뿐만 아니라 마음의 깊은 상처를 증언하기도 한다. '나의 아저씨'는 누추하고 남루한 건축공간 속에서 인간의 상처와 슬픔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한국의 건축물을 혐오하며 살아온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기적이었다. 비천함을 고귀함으로, 누추함을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전복시키는 예술의 기적.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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