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불·땀으로 빚는다…200년째 가업 잇는 ‘3대 옹기장’

200년째 내려오는 상주옹기장 삼대 손주 정웅혁씨, 정대희 보유자, 아들 정창준씨(왼쪽부터). 경상북도 무형유산인 옹기장 정대희 선생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 정창준 씨와 손자 정웅혁씨까지 8대가 옹기를 만들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드넓은 평야 비옥한 땅, 장 문화 발당
집집마다 장독대 위 가득 채운 '옹기'
이안면 소암리 8대가 전통옹기 제작
경상북도 무형유산 정대희 선생 가문
세종실록지리지 등장한 '황옹' 재현
아들 정창준·손자 정웅혁 '옹기장 길'
흔히 사람의 타고난 됨됨이와 가능성을 그릇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 내면의 깊이가 깊거나, 어떤 일을 거침없이 해나갈 때 '그릇이 크다'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그릇의 크기와 재질이 사람의 심성과 비교될 만큼 그릇은 인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유와 공감, 나눔의 도구였다. 땀 흘려 열심히 일구어낸 수확물을 그릇에 담아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전하고, 남은 음식은 그릇에 저장함으로써 궂은 계절을 이겨내는데 활용했다. 이 같은 '그릇의 문화'가 일찍부터 발견된 곳이 바로 상주이다.
상주 청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반달돌칼과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문화가 잘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상주시 사벌면에 있는 금흔리 이부곡 토성 북쪽 성벽에서는 무문토기 편과 두형 토기, 삼국시대 토기 편이 대량 발견됐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상주는 백토를 활용한 백자 생산지로서도 유명했다.
무엇보다 상주는 전 시기를 거쳐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상이 담긴 '옹기 문화'가 활발히 꽃을 피운 곳이다. 옹기는 과거 냉장고의 역할을 대신하던 것으로 쌀을 보관하거나, 된장과 간장·김치를 담아 발효시키는 데 주로 활용했다. 옹기 자체만으로도 전통문화이지만 그 쓰임새 또한 한국의 전통을 담는 중요한 문화 자산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집안의 장맛을 보고 전쟁터로 향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장은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중심이자 집안의 내력이었으니, 그 장을 보관하는 옹기는 오죽 중요했으랴. 좋은 옹기를 쓰는 것이 1년 동안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그 시절, 상주가 대표적인 '옹기 문화'의 도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손님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상주옹기장 보유자 정대희 씨.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농경문화의 발달이 가져온 '옹기 문화'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상주목조(尙州牧條)에 관내 오사요리라는 곳에 황옹을 만드는 도기소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공방 주변 동네에서 옹기흙이 많이 나오며, 지역 주민들은 약 100년 전부터 이안면 흑암리 일대를 '옹기굴', '함창뜰', '질구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인근인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는 200년째 내려오는 가업을 잇는 옹기장 가문이 있다. 경상북도 무형유산인 옹기장 정대희 선생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 정창준 씨와 손자 정웅혁씨까지 8대가 옹기를 만들고 있다.
전통 옹기 제작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이들은, 전통 장작가마인 연실요에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펴 1천200℃ 이상의 고온으로 수일간 유지해 전통 옹기를 만들어 낸다. 옹기를 만들기 위해 흙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일도 보통 고된 일이 아니다. '대옹'하나를 만드는데 최소한 흙 100㎏이 필요하며, 흙을 쌓아 올릴 때도 단단하게 두드려 흙 속 공기를 빼내면서 항아리 모양을 잡아야 한다. 이때 옹기 중간에 참숯불을 매달아 흙을 말려야 하는데, 그래야 쌓아 올린 흙이 무너지지 않는다.
전기 장비가 아닌 숯불을 활용하는 것 역시 전통 방식이다. 숯의 열기에 화상을 입을 때도 있고, 많은 힘이 필요하지만, 때론 섬세한 작업이 이어지기 때문에 '집을 짓듯 옹기를 짓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옹기 하나가 흙과 불, 땀으로 완성되기에 과거에는 소 한 마리 값을 쳐줘야 할 만큼 귀한 것이었다. 이 같은 옹기 문화가 상주를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상주의 드넓은 평야와 비옥한 땅은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고, 벼농사가 번성하면서 추수철이 되면 쌀을 담아둘 저장 그릇이 필요했다. 쌀 문화는 장 담그는 문화까지 더불어 발전시키면서 집 안 곳곳에 장독대가 생기고, 장독대 위에는 옹기가 자리 잡게 되었다. 7대 옹기장인 정창준 씨 (45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과거에는 상주에 더 많은 옹기장이 있었다고 한다. 상주 부원동에는 옹기공방이 20개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좀 더 선조 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옹기장들은 지금처럼 정착한 것이 아니라 상주와 보은 일원의 좋은 땅과 가마를 찾아 이동하며 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옹기는 상주 내에서의 쓰임 외에도 경상북도 북부 지방으로 퍼지며 다양한 지역에서 활용이 되었다.
상주에서 유독 '옹기'가 많이 만들어졌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상주가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교역이 용이했고, 사람도 많이 모였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장 냄새가 끊이질 않았고, 장독대 위에는 수십 개의 옹기가 쌓였다.
두 번째 이유는 흙이 좋았기 때문이다. 도자기의 경우 산에서 나오는 흙을 많이 사용하기에 대부분의 도자기 공방은 산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옹기는 평야 지대의 흙을 주로 사용한다. 대토지가 있는 상주에는 그만큼 옹기흙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많았던 것이다. '쌀의 도시'였던 상주의 특성도 옹기의 유명세를 잇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상주옹기장 삼대 손주 정웅혁씨, 정대희 보유자, 아들 정창준씨(왼쪽부터). 정대희 선생은 전통 옹기 제작 방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는 황색 옹기를 재현한 '황옹'을 대표 작품으로 내놓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마지막 남은 옹기장 가문의 꿈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전통 방식 그대로의 옹기를 만드는 가문은 경상북도 무형유산인 정대희 선생의 가문 단 한 곳만 남았다. 정대희 선생의 선조들도 상주와 보은 일원을 옮겨 다니며 옹기를 만들어 왔는데, 6·25 이후인 약 70년 전 상주 이안면에 정착을 하였다.
7남매 중 홀로 옹기장의 길을 선택한 정대희 선생은 전통 옹기 제작 방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는 황색 옹기를 재현한 '황옹'을 대표 작품으로 내놓고 있다. 흙이나 유약의 배합, 굽기의 온도에 따라 색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7대 정창준 씨와 8대 정웅혁 씨는 한때 다른 꿈을 꾼 적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만져 온 흙의 촉감과 전통 옹기의 자부심을 잊을 수 없어 대를 이어 옹기장의 길을 걷고 있다. 특히 가장 젊은 옹기장인 정웅혁 씨는 '웅기 공방'을 통해 전통 옹기 제작법을 일반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잊혀 가는 옹기의 소중함과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6대 정대희 선생과 7대 정창준 옹기장은 '옹기의 문화'가 옛 것이 되는 것이 가장 걱정스럽다. 집에서 장을 담는 문화가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장독대마저 사라지면서 옹기가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습도와 온도에 변화가 없는 옹기의 장점을 살려 장롱 대신 옷을 보관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지만 있었다. 이 또한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
"옹기 작업을 한 지 25년이 되었는데, 갈수록 옹기를 쓰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입니다. 가장 큰 바람은 옹기 문화가 잊히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옹기 기술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창준 옹기장은 아버지와 자신이 정성껏 옹기를 빚으며 해 오던 말이라며, 조심스럽게 속내를 비쳤다.

가마에서 나온 옹기를 살펴보고 있는 상주옹기장 보유자 정대희 씨. 정대희 선생의 선조들도 상주와 보은 일원을 옮겨 다니며 옹기를 만들어 왔는데, 6·25 이후인 약 70년 전 상주 이안면에 정착을 하였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상주옹기장 이수자 정창준씨가 건조작업을 마친 옹기를 가마로 옮기고 있다. 경상북도 무형유산인 정대희 선생의 가문의 7대 정창준 씨는 한때 다른 꿈을 꾼 적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만져 온 흙의 촉감과 전통 옹기의 자부심을 잊을 수 없어 대를 이어 옹기장의 길을 걷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상주옹기장 손주 정웅혁씨가 옹기공방에서 항아리를 빚고있다. 가장 젊은 옹기장인 정웅혁 씨는 '웅기 공방'을 통해 전통 옹기 제작법을 일반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전통이 전 세계에 통하는 문화가 되길
좋은 흙에 나무를 태운 잿물을 유약으로 발라 가마에서 7박 8일을 고온에 구워내는 전통 방식은 극한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노력과 정성은 숨 쉬는 옹기를 만들어 발효식품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고, 온도 조절 또한 탁월하게 해준다. 이러한 기술이 담겨 있기에 '옹기'는 민중적이다. 과거부터 궁궐과 관청은 물론 민가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그렇다면 현시대의 '옹기'는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까? 천연 유약으로 전통 가마에서 구워내는 형식은 건강식품 용기로서 그 환경적 가치를 새롭게 주목받아야 한다. 상주의 옹기가 과거의 문화유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가치라는 공감대를 확대해 나간다면 또 하나의 K-문화를 선도하는 트렌드가 되지 않을까. 상주의 흙 맛이 제대로 살아있는 옹기의 깊은 맛이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하길 기대해 본다.
글=박성미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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