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산 장원방 출신 과거 급제자 15명 명단.<영남일보 DB>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에는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들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있다. <영남일보 DB>
선산 장원방이 배출한 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금오서원 강당 정학당 대청에서 바라본 읍청루 전경. <영남일보 DB>
김장호(왼쪽) 구미시장과 김성조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장이 2023년 8월 '장원방 사업 위·수탁 협약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영남일보 DB>
15명 과거 급제자 배출, 인재향 위상 재조명
장원방 복원, 구미 랜드마크·역사 체험공간 목표
영남일보 연재 촉매, 지역사회 염원 결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朝鮮人才半在嶺南),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嶺南人才半在善山)에 있다.' 조선시대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나오는 구절로 선산이 예부터 인재향(人材鄕)으로 불리는 이유다.
조선시대 인재의 요람이었던 '장원방(壯元坊) 복원(역사문화체험관)' 사업이 추진된다.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 통합 이전 선산군민 6만5천여명의 가장 큰 숙원으로 손꼽던 장원방 복원사업은 선산읍 노상리에 120억원을 들여 2027년 준공한다. 지난해 8월 설계 공모를 거쳐 이르면 오는 9월에 착공할 장원방은 지상 2층 1개동(연면적 2천78㎡)으로 체험관, 전시관, 다목적광장, 주차장, 정원 등을 조성한다.
#장원방과 영남일보
역사의 뒤안길에 남아있던 장원방 복원사업은 구미시·영남일보가 공동기획한 스토리텔링 '공부의 신(神) 천재의 요람, 장원방'이란 신문연재가 물꼬를 텄다. 관련 신문기사는 2016년 6월 9일~9월 2일 13회에 걸쳐 실었다.
당시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은 2015년 초부터 장원방 이야기 발굴을 시작했다. 영남일보 장원방 이야기가 연재될 때마다 선산지역 원로와 향토사학자들의 응원이 쏟아져 지역민의 관심이 모았다. 그해 9월에는 구미시청에서는 시민과 출향인 200여명이 '장원방 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장원방의 영광을 재현할 방안을 찾아내 구미시에 제안했다. '장원급제자가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장원방은 옛 선산읍 영봉리(선산읍 이문·노상·완전리)로 서당 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과거급제자는 길재의 제자 김치(金峙)다. 고려 창왕 즉위년인 1388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조선 초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에 올랐다. 김해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원방에 살면서 김숙자와 함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숙자의 아들이자 장원방을 극찬했던 김종직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김치의 사위 정지담(鄭之澹)도 장원방 출신이다.
1416년(태종 16) 친시(親試) 을과(乙科) 급제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지낸 전가식(田可植)은 조선조 장원방에서 배출한 첫 장원급제자다. 그는 1399년(정종 1)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서 1등을 차지했다. 중앙관직에 나아가서는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관료였다. 1449년(세종 31) 84세로 세상을 뜨자 세종이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의 장인 김성미(金成美)도 빼놓을 수 없다.
1378년(고려 우왕 4) 장원방에서 태어나 조선 태종 때 문과에 등제됐다. 일부 문헌에는 '태조 때 급제했다'는 기록도 있다. 예문관직제학 겸 군기시판사를 지낸 김성미는 충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사위 이맹전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중앙무대에 나가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서(農書)로 손꼽는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정초(鄭招)도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그는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에 올랐다.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 집안은 장원방의 명문가로 꼽힌다. 김숙자는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그의 두 아들 김종석(金宗碩)과 김종직(金宗直)도 장원방에서 학문을 닦으며 문과에 급제했다.
장원방의 최고 가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집안이다. 하담(河澹)을 비롯해 그의 아들 하강지(河綱地), 하위지(河緯地), 하기지(河紀地)가 대를 이어 급제했다. 아버지 하담은 1402년(태종 2)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을, 사육신으로 이름을 떨친 아들 하위지는 1438년(세종 20) 식년시 을과에 장원급제했다. 하위지는 어릴 때부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탓에 동네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강지는 1429년(세종 11) 식년시에 급제했고, 하기지는 형 하위지와 같은 해인 1438년(세종 20년) 식년시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405년(태종 5)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급제한 유면(兪勉)은 하담의 장인으로 그 역시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다. 처가를 합쳐 한 집안에서 5명(하담,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유면)의 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의 대표적인 가문이다. 세조대에 이르러 하위지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면서 장원방에서는 과거급제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선초기 인재향'이라는 명성도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장원방의 학풍이 뿌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앙무대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을 숭상하는 전통과 정신적 가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학풍은 16세기 후반 영남사림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중앙무대에 복귀하면서 다시 빛을 발한다. 명맥이 끊겼던 장원방 출신 과거급제자는 선조대에 이르러 다시 배출됐다.
그 명맥을 이은 인재가 김여물(金汝)이다. 그는 1577년(선조 10)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며 '인재향 장원방'의 옛 영광을 재현했다. 김여물은 임진왜란 때 신립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섰다가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물에 투신해 순국한 인물로 유명하다.김여물 이후에는 박춘보(朴春普)가 1738년(영조 14) 식년시 을과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성품이 강직했던 그는 조정의 제반사를 능숙하게 처리해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명필로 이름을 떨쳤고, 선산읍성 낙남루의 상량문을 직접 짓기도 했다.
#지금의 장원방조선초기 인재향으로 명성을 떨쳤던 장원방은 지금 역사의 뒤편으로 저물어었다. 무엇보다 이 마을 출신 인재들과 관련된 문화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생가는 물론이고 그들이 공부했던 곳도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이다.효행이 지극했던 김치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렸던 정문(旌門)은 문헌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김치가 선산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었던 사당도 마찬가지다.
단계 하위지가 공부했던 독서당(讀書堂)과 그가 수양대군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한때 낙향해 거처했던 공북헌(拱北軒)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선산 선비들이 걸었던 과거길을 이웃해 솟아있는 봉우리가 '장원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현재 선산중학교 뒤편에 남아있다.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할 당시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회화나무는 담벼락에 끼여 위태롭게 서있다.
박은호 전 구미문화원 원장은 "인재향 구미(선산)을 상징하는 장원방처럼 한 마을에서 15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온 곳은 전국적으로 매우 드물다. 장원방 복원사업은 구미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물론 관광의 명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백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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