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생산성, 과소평가된 채 시작된 수급 추계
의사 수보다 중요한 건 ‘남을 수 있는 구조’
교육·수련 준비 없는 증원, 의료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도
정부가 의사 인력 부족을 근거로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그 계산의 출발점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의료계의 문제 제기가 나왔다. 대구시의사회는 지난 8일 성명을 통해 "의대 증원 논의는 단순한 숫자 확대가 아니라 의료 시스템 전반의 구조를 함께 살펴야 할 사안"이라며 정부의 의사 인력 수급 추계와 정책 방향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했다.
대구의사회가 지적한 핵심은 세 가지다. △AI 등 기술 발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수급 추계 △필수·지역의료 문제를 외면한 채 진행되는 증원 논의 △교육·수련 인프라에 대한 준비 부족이다. 이들은 "전제가 흔들린 상태에서 숫자만 늘리는 정책은 오히려 의료 현장의 혼란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AI 생산성 6% "의료 현실과 괴리"
정부 수급 추계위원회는 인공지능(AI)에 따른 의사 생산성 향상을 약 6% 수준으로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구시의사회는 이 수치가 "현재의 기술 발전 속도와 해외 의료 현장의 변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실제 여러 국제 연구에서는 AI가 진단 보조, 판독, 문서 작성 등 의료인의 행정·반복 업무를 대폭 줄일 것으로 보고 있다. 2024년 OECD 보고서에서도 "2030년까지 의료 인력의 행정 업무 중 최대 30%가 자동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의료 AI 도입이 빠르게 확산된 미국의 경우, 다수 의료기관이 AI를 통해 진료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시의사회는 "AI에 따른 생산성 향상만 보다 현실적으로 반영해도 의사 부족 규모는 수천 명 단위로 달라질 수 있다"며 "현장에서는 최대 6천 명가량의 부족 인력이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고 밝혔다. 의료 이용 행태 변화, 인구 감소, 의료진의 근로 한계 등 미래 변수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나온 숫자에 정책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견해다.
◆"의사 수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
시의사회는 의대 증원이 지역의료와 필수의료 문제를 해결할 해법처럼 제시되는 데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현재 의료 현장의 가장 큰 위기는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라기보다, "남아 일하기 어려운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저수가 체계, 과도한 형사·민사 책임, 장시간 노동과 높은 위험 부담은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현장에서 의료 인력이 빠져나가는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이런 구조가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대 정원만 늘릴 경우, 신규 인력이 다시 수도권과 인기 진료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의료계의 우려다.
시의사회는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증원이 오히려 지역의료 공백을 더 키울 수 있다"며 "의사 수 확대 논의는 필수의료를 지탱할 수 있는 제도 개편과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수련 준비 없는 증원은 '질 저하'로 이어질 수도
의대 정원 확대가 곧바로 의료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됐다. 의학교육은 단기간에 확충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교수 인력, 실습 환경, 수련병원 여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급격한 증원은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시의사회는 "의학 교육은 국가의 미래 의료 수준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며 "준비 없는 정원 확대는 결국 국민 건강권에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밝혔다. 과거 정원 조정 과정에서 교육·수련 인프라 부족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됐던 점도 상기시켰다.
◆"숫자 늘리기 전에, 계산식부터 다시 보자"
대구의사회는 정부에 △과학적 근거와 현장 의견을 반영한 수급 추계 재검토 △의료계와의 충분한 소통 △필수·지역의료 구조 개혁 논의 선행을 요청했다. 의대 정원 확대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정책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부터 바로 세우자는 제안이다.
시의사회 관계자는 "의대 증원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료 시스템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라며 "숫자를 늘리기 전에 그 숫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선택이 향후 수십 년간 대한민국 의료의 방향을 좌우하는 만큼, 성급한 결정보다는 정밀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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