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7(월)

[취재수첩] 百聞不如一見

| 2019-04-23 08:08:37


밤 11시다. 사방이 고요하다. 휴일도 없이 이사람 저사람 만나느라 지친 남자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안방으로 직진했다. 이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서서히 남자 몸에 달린 기관들이 무뎌지면서 빛과 냄새, 소리, 진동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뇌파의 진폭도 줄어들고 주파수도 느려진다. 이내 잠이 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그리 멀지 않은 (1㎞나 떨어졌을까) 곳에서 키가 50m쯤 되는 거인이 단숨에 몇 걸음을 내디뎠다. ‘쿵! 쿵쿵쿵!’ 잠이 깬다. 2~3초 후 침대가 아래위로, 그리고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남자는 두려움에 잠을 청하지 못하고 동이 틀 무렵, 전날 밤의 일을 한번 더 겪은 뒤에야 피곤에 못이겨 잠이 들었다.

주 중에는 서울에서 근무하다 주말이면 ‘포항 집’으로 내려가는 내가 규모 5.4 포항지진 3일 후인 2017년 11월18일 포항에서 겪은 이야기다. 이후 서울로 올라 온 나는 책상 위 휴대전화 진동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일을 수개월 동안 반복했다. 기자가 겪은 지진은 규모 3.0이었으니 트라우마도 경미했으리라. 하지만 본진을 겪은 포항 시민의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포항 지진 피해자의 20~30%는 극단적 선택을 고려했으며, 이들 중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이도 있었다. 물리적인 피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회에선 포항 지진 특별법 제정을 두고 여야가 이견을 보이며 ‘네탓’만 하고 있다. ‘특별법을 만들자’는 총론은 같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방법론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자유한국당은 ‘지진특별법’을 당론으로 정하고 4월 초 법안을 제출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상임위에서 처리해 본회의에서 통과시키자는 입장인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당이 발의한 법안이 허술하다며 입법을 전제로 한 국회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여야 합의로 법안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특별법을 발의한 한국당 김정재 의원(포항북구)은 “특별법으로 정부가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명분만 만들어 주면 된다. 세부 지원책은 발의안을 중심으로 정부부처와 논의하자”고 주장하고 있고, 민주당 지진특위 위원장인 홍의락 의원(대구 북구을)은 “(한국당이) ‘세월호’를 ‘포항’으로 바꿔놓은 특별법을 발의하고는 공중전만 한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것은 없다”며 맞서고 있다.

특히 홍 의원은 지난 20일 페이스북에 “25일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되면 (포항지진) 관련 내용만 살펴보고 특위 위원장을 그만 두겠다”며 “포항 시민 여러분 건승을 빕니다”라고 한국당을 압박하는 듯한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하다. 공(功)을 상대방에게 넘겨주기 싫은 듯한 인상이 짙다.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둔 ‘보이지 않는 정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강덕 포항시장과 서재원 포항시의회 의장은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삭발까지 했고, 포항시민은 포항지진을 가지고 여야가 싸우지말라고 애원하고 있다.

백문이불여일견. 국회의원 300명 모두를 2017년 11월15일 오후 2시29분31초의 포항으로 모셔다 놓고 싶다.

김상현기자 (서울취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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