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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지대] 정체성 이야기 : 의사와 환자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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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요즘 들어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 '정체성'이라는 말이 곧잘 등장한다. 필자가 음악의 정체성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면서 확정한 나름의 정체성은 다음 네 가지 정도로 수렴된다. (1)정체성은 차이(점)에 관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다시 말해 정체성은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리고 타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만들어진다. (2)정체성은 수많은 종류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협상된다. (3)정체성은 특정한 상황과 타인들과의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4)정체성은 한 개인이나 그룹의 내러티브적 역할을 포함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관습, 관행, 유산 등을 포함한 과거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현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재구성된다는 학계의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정체성과 전통은 과거의 현재화 내지 현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지평으로서 항상 변화하고 재구성된다는 사실! 여기에는 내 의지로 변화 가능하면서도, 의지와 무관하게 변화될 수 있는 두려움이 저변에 깔려 있다.

박사과정 중 히스로 공항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의 자서전 '숨결이 바람이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는 정체성의 이러한 가변성을 강력하게 대변한다. 문학과 과학에 열정을 가지며 예일대 의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레지던트를 거치면서 신경외과 교수로 가는 탄탄한 미래가 보장된 36세의 칼라니티는 어느 순간 폐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스캔 데이터를 면밀히 조사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던 그는 다음 날 불치병과 싸우고 있는 환자(불평 없이 고통을 견디는 자)가 되어 검사실에 누워 있다.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환자복을 입은 새로운 정체성이 그의 삶을 장악하면서 이전의 정체성을 대체한다. 그렇게 의사와 환자로서의 역할이 전도되면서 죽음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의사로서의 내 정체성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칼라니티가 폐암 진단을 받은 후 마지막 22개월 동안 그의 전체 정체성은 위태로움의 연속이다. "나는 신체적으로 쇠약해졌고, 내가 상상했던 미래와 개인적인 정체성이 무너졌으며, 나는 내 환자들이 직면했던 것과 같은 실존적 어려움과 마주하게 되었다." 코비드19에 이어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유난히도 자주 들리는 요즘. 많은 환자들은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다니며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운 좋게 담당의라도 만나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 2월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내 친구는 암덩어리가 커질까 퍼질까를 걱정하며 한참 뒤로 미뤄진 수술만을 기다린다. 14만 의사와 2만 의대생 그리고 이들 가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시민이며, 현재와 미래의 환자일 수 있다. 하여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정부와 의협의 갈등과 반목을 지나 진정한 대화와 해결에 따른 새로운 통합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칼라니티는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을 읊조린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그리고 아내 루시는 이미 바람이 된 남편을 생각하며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아내이자 목격자였다." 극과 극은 통한다(Extremes meet)라는 서양 속담을 생각해본다. 부정의 부정,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그날을 기다리며, 우리 또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자가 될 것이다.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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