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유학자의 ‘비분강개’ 세계로 퍼져나가다
‘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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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당 장석영이 만년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녹동서당. 장석영이 태어난 칠곡 기산면 각산리에 위치해 있다. |
◇ 스토리 브리핑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은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전 형조참판(刑曹參判) 장시표(張時杓)가 아버지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문하의 대표적 문인들을 일컫는 주문팔현(洲門八賢)에 속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더불어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 지방보상 회장으로 활약했으며, 3·1운동 때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전국 유림들의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1919년 4월2일 성주장터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회당문집(晦堂文集)’과 ‘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 그리고 옥중일기 ‘흑산록(黑山錄)’ 등이 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 칠곡 국채보상운동 회장 추대
“삼가 아뢰옵나니, 을사오적을 극형에 처하고 을사늑약을 철회하소서!”
상소에는 울분과 통분이 넘쳐흘렀다. 장석영은 차마 울지도 못할 따름이었다. 한 자 한 자 적어가는 검은 글자마다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국권 박탈이라니. 저들의 뼈를 갈아 마시고 거죽을 씹어 먹어도 충분치 않다.’
상소의 이름도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 즉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였다.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유생 300여명을 규합하여 올린 상소였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중의 하나가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천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함이었다. 국민의 자발적인 모금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운동이 거국적으로 파급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대들이 나를 칠곡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니 이에 나는 웅변하오. 절기로야 곧 봄이로되 우리 땅에는 아직도 찬바람과 얼음뿐이오. 이에 나는 저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분골쇄신하겠소!”
장석영은 칠곡을 중심으로 금연 운동과 의연금 모집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912년 3월3일부터 6월9일까지 만주와 노령(露領) 지역 일대를 순력하며 독립운동 적지를 물색했다.
“내가 보기에 독립운동의 적지로는 요동 쪽의 서간도(西間島)일세.”
뿐만 아니라 한인 이주 실상도 아울러 기록했는데 바로 ‘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이다.
#2. 파리장서 초안 작성
1919년 기독계와 불교계가 주도한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교계는 대대적인 장서운동을 일으켜 이에 호응하기로 했다.
“명색이 유학을 한 자가 십년 동안 혀를 감추고 문을 닫고 울음을 삼켰으나, 이제 천년에 한 번 오는 절호의 기회에 한마디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문자로서 의리를 밝힐 따름이다.”
바로 파리장서운동이었다.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장문의 장서를 배포해 조선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하고자 했다. 무려 137명의 유림 대표가 참여하며 뜻을 모았다. 이에 장석영은 초안을 작성했다. 그가 가슴을 떨며 적은 머리글과 마무리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유생 장석영(張錫英) 등은 파리 회중에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 망국의 비천한 유생으로, 남은 목숨에도 죽지 못하고 십년 동안이나 혀를 감추며, 감히 천하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한 것은 타인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감히 품고 있던 마음을 만국평화회의 자리에 스스로 펴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듣건대 파리 만국회의에서는 폴란드 등 모든 약소국의 독립권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의 사정만이 유독 여러분들의 긍휼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태양이 하늘에 떠서 만물을 모두 비추는데도, 유독 동이 아래는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세밀하게 상황을 살피시고, 특히 시모노세키조약과 유럽의 통첩 사례에 따라 우리들이 예전과 같은 독립자주권을 허락하여 주시고, 일본인의 그물에서 벗어나 세상의 동포들과 나란히 서게 하신다면, 이것이 어찌 작은 나라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천만 번 살피소서.’
하지만 글의 전반적인 흐름이 너무 과격해 외교문서로 적합지 못하다는 이견이 뒤따랐다. 결국 논의끝에 그의 안은 최종 채택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장석영은 유림 대표 137명의 1인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이 장서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년)이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갔고, 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를 인쇄해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3. 성주 장날 만세운동 주도
“자, 이제 우리의 뜻을 세계에 알렸으니 우리도 고향의 만세운동을 의논합시다. 이것은 천의(天意)오.”
당시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에 거주하던 장석영은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 유림과 접촉하며 만세운동 일정을 계획하였다. 이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측의 만세운동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과 만나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1919년 4월2일 성주 장날이었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평화로운 시위였다. 하지만 오후 1시경, 시장에 모인 군중의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다급해진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총 소리가 요란하게 흩어지고 화약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사상자가 발생했고 장석영은 결국 유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만세운동 조사 중에 파리장서 내막이 알려졌다.
“‘파리장서’를 만들어 조선의 독립을 청한 적이 있는가?”
“있소.”
장석영은 당당하게 답했다.
“국법을 위반하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은 국가의 적이 아닌가?”
“지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았다고 치면, 빼앗긴 사람이 토지를 찾고자 하는데 빼앗은 자가 도적인가, 찾고자 하는 자가 도적인가? 찾으려는 자와 빼앗은 자가 재판소로 와서 송사를 하였다면 재판관은 누구를 도적이라 하겠는가?”
장석영은 꿋꿋하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일제의 살벌한 보복은 피할 수 없었다. 장석영은 그해 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시작했다.
#4. 흑산록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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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동서당 마당 한켠에 세워진 회당장선생사적비. |
八空山(팔공산) 져 구룸아 오고가고 너는 自由(자유)로다
너도샤 故國悲懷(고국비회) 못닛는가
往來間(왕래간) 비 한줄기 淚水(루수)로다
장석영은 비분의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손바닥만 한 감옥의 창문 틈으로 보이는 팔공산 산록에 어둑하게 얹힌 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것이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자유가 절실했다. 일신상으로는 구속에서 풀려나기를, 거국적으로는 조국이 광복을 이루기를 말이다. 그러던 8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가 확정됐다. 총 132일 동안 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투옥 중에 장석영은 자결을 위해 곡기를 끊기도 했다. 하지만 3일 동안의 단식에도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지 않자 포기하고, 살아남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장석영은 출옥 후 석 달 정도 지나 ‘흑산록’을 완성했다.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쓴 옥중 일기로 무려 292일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무엇보다도 ‘흑산록’에는 성주에서의 만세운동 과정과 파리장서 초안에 대한 자료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허어! 꿈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속이 후련하구나. 실제라면 오죽 더 기뻤을꼬!”
꿈속에서 을사오적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하지만 장석영은 곧 애석하고 애통절통하며 비분강개한 마음에 얼굴 가득 그늘이 내렸다.
“대체 우리의 독립은 언제나 올 것인가?”
그리고 이 꿈을 계기로 ‘흑산록’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喜看武穆斬秦檜(희간무목참진회) 무목공 岳飛(악비)가 진회를 베는 것을 즐거이 보나니
更願神州復漢都(갱원신주복한도) 중국이 한나라 도읍으로 회복되길 더욱 바라네.
寄語吾東千萬族(기어오동천만족) 우리 동방의 천만 겨레에게 말을 하노니
太平同我共歡呼(태평동아공환호) 태평세월을 나와 함께 기쁘게 불러보세.
악비와 진회는 중국 중세의 민족영웅과 매국노를 이른다. 즉, 중국이 오랑캐의 마수에서 벗어나 한나라로 회복되기를 바라듯이, 조선 역시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하기를 희망하는 그 염원을 나타낸다.
현재 칠곡 기산면 각산리에는 장석영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만년에 지은 녹동서당이 있다. 서당 한 편에는 1999년 3월 세운 ‘회당장선생사적비(晦堂張先生事蹟碑)’가 서 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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