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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간이역, 그 곳 .1] 봉화 분천역(상)

2014-10-21

두메산골에 역이 들어서고…목도하는 사내들은 호시절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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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아기백호열차’로 불리는 백두대간 협곡열차 V-트레인이 봉화 분천역을 출발하고 있다. 1970년대 분천역은 이웃한 춘양역과 함께 대도시로 나가는 금강송의 최대 집산지였고 역 주변은 연일 목도를 하는 사내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중부내륙 관광열차의 인기가 갈수록 뜨겁다. 열차는 경북내륙을 비롯해 강원, 충청 구간을 왕복운행하며 산골 오지의 비경과 옛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중부내륙 순환열차인 O-트레인과 백두대간 협곡열차인 V-트레인으로 나눠 운행되고 있으며, 지난해 4월 개통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코레일 경북본부에 따르면 개통 1년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50만명이 넘는 관광객(O-트레인 26만5천명, V-트레인 27만3천명)이 이용할 만큼 인기가 높다. 주말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이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O-트레인은 대한민국 사계절을 모티브로 중앙·영동·태백선 순환구간을 운행한다. V-트레인은 아기백호를 모티브로 해 영동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원 철암역~경북 분천역 구간을 왕복 운행한다. 특히 열차가 지나는 경북지역 간이역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산골 오지나 다름없던 곳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간이역을 중심으로 장터가 열리고, 트레킹 등 다양한 관광 콘텐츠가 개발돼 지역경제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영남일보와 경북도는 중부내륙 관광열차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간이역, 그곳’ 시리즈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시리즈는 관광열차가 지나는 경북지역의 주요 간이역을 소재로 다룬다. 산골오지 간이역의 변천사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간 서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간이역에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를 끄집어 내 새로운 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시리즈 첫회는 봉화 분천역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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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개통이후 관광열차를 이용하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개통 1년6개월 만에 5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열차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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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천역의 매표소 옆에는 맞이방이 마련되어 있다. 대합실 격인 이곳은 각종 도서와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백두대간의 줄기를 이루는 죽미산과 황악산. 두 산이 만든 깊은 골짜기에서 여우천이 흘러내리고, 천은 갈라져 낙동강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부내’ 또는 ‘분천’이라 했다. 하천의 옆으로는 토사가 쌓여 기름지고 평평한 땅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평지’라고도 했다. 소낙비 내리는 것처럼 시원해 ‘여우천’이라 했다는 물길. 그것은 낙동강을 만나 감쪽같이 사라지니 그 모습 그대로 여우천인 듯도 하고, 여우천을 만나 낙동강은 더욱 몸을 불리니 그 모습이 그대로 ‘분천(汾川)’이다.


#1. 두메산골 가장 높은 곳에 선 분천역

낙동강 물줄기가 분천의 땅을 휘돌아 나간다. 산자락을 따라 커다란 주머니를 그리듯 휘돈다. 주머니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강가에 바짝 붙어있는 작은 땅이 능호(凌湖)다. 낙동강이 감돌아 마치 호수와 같다고 해서 능호라 했다. 깊고 깊었다. 외지고 외진 땅이었다. 강과 산이 순결하게 가두어 놓은, 사는 이 몇 없는 두메산골이었다.

이 호수 같은 땅에 기찻길이 놓이고, 가장 높은 자리에 역이 생겼다. 1956년 1월1일 개통된 분천역이다(1955년 12월31일 대한민국관보 교통부고시 제452호).

“우리 마을이 봉화에서 제일 웃짝이라. 우리 마을 터는 뒤로 돌아앉은 형국이여. 강을 바라보는 남향으로 집을 앉힌 것이 아니고, 저 산을 보고 뒤로 돌아앉은 셈이지. 그게 다 저 역으로 나무도 내고, 사람들이 드나들던 까닭이제.”

역이 들어서면서 분천리는 내륙지방과 동해안 울진을 연결하는 매개 지역이 되었고, 능호는 역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옛날에 기차 가는 거 구경한다고 나와 보면 저짜서부터 삐~ 하고 들어와. 얼마나 좋아.”


#2. 목도가 울려 퍼지던 역마을 전성기

1970년대 상업적 벌채가 번성하던 시절, 봉화와 울진 등지에서 벌채된 금강송은 이웃한 춘양역과 이곳 분천역을 거쳐 대도시로 갔다. 역 주변은 온통 금값보다 귀했다는 금강송으로 가득했고 목도를 하는 사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는 목도 해가 벌어먹고, 또 철도 노동일 해서 사는 사람이 많았어.”

“목도를 근 10년은 했지. 최고 많이 벌면 하루 2만원. 적게는 1만원. 밤에 나무 내리는 것도 하고. 낮밤 없이 일했지. 몸 움직이는 대로 돈이니까.”

“나무 야적을 시켜 놓으면 7∼8m 높이로 쌓여. 한 사람 들어갈 정도의 통로밖에 없고.”

금강송이 쌓이면 약속이나 한 듯 동네 아낙들은 역 근처로 삼삼오오 모였다.

“여자들이 나와서 나무 껍데기 벗기는 거 그걸 제일 많이 했어. 벗겨서 땔감으로 쓰려고. 애들은 또 얼마나 많아. 그땐 많이 낳을 때니까. 젊은 색시가 아 업고 나무 해가 머리에 지고, 다 그랬어.”

벌목이 왕성하자 외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열여섯에 여기 왔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먹고 살라고 이곳에 들어와서 목도를 했어. 어린 나이에. 그때는 뼈가 부드러울 때잖아. 너무 무리를 했지. 이젠 목을 잘 들지를 못해 이래 꾸부리가지고 다녀.”

“빈집이 없었어. 한집에 세 가구 네 가구씩 살고 그랬지. 방 한 개뿐이면 다락을 달아가꼬 또 거기 한 가구가 살고 그랬어.”

“그때는 목도하는 사람들이 한 80명 정도 있었어. 목상도 많이 왔어. 춘양역과 경기가 거의 쌍벽이었지.”


#3. 외지인 몰리면서 역 상권 발달

외지에서 사람이 몰리면서 분천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역 앞으로 통로가 일자로 쭉 나있는데 전부 일본식 상가 건물이야. 전부 가게였고. 지금은 많이 고쳐서 바뀌었지만 흔적은 남아 있지. 농사보다는 상업 쪽으로 많이 했어. 주로 음식점과 숙박시설. 들락거리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여인숙도 많았지. 대부분 목상이 거기서 많이 잤어. 이발소도 두 개 있었어. 협동 이발관. 현대 이발관. 시골 같지가 않았어. 당구장도 있었고, 술집이 주로 많았어. 아가씨 있는 집.”

부산식당, 영천식당, 역전식당 같은 간판을 내건 선술집에서는 외지에서 들어온 아가씨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몇 군데의 기생집도 마을에 살림을 꾸렸다.

“일하느라 바쁜데 기생집을 우예 가니껴. 청년은 그런 술집 못 갔지. 주로 주머니 두둑한 목상이나 그런 데 갔어.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그런 데 갈 일이 없었어. 사느라 바빴기 때문이지. 일터에서나 막걸리 한잔 마실까.”

지갑을 여는 이들은 잠시 머물다 가는 외지 사람이었다. 실제 주민보다 돈을 쫓아 움직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인구가 300∼400명쯤 됐는데 유동인구는 하루 1천명 정도 됐어. 동네 사람보다 외지 사람이 더 많았지.”

“경기가 좋았어. 강가에는 뽀드장(보트장)도 있었어. 배 만들어가지고 타고 여식 아들 데려다 놓고 장사하는 집도 있었고. 호시절도 그런 호시절이 있을까. 옛날에는 참 좋았어.”

“그때는 여기 장도 섰어. 1일, 6일마다. 장날 오는 사람들도 많았어.”

“묵호 가면 혼자 사는 아줌마가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혼자서 다라이 두 개, 세 개 이고 들고 그래 왔어.”

아침의 역 마당에는 동해에서 온 생선이 부려졌다. 산골 사람이 아침 찬거리로 싱싱한 해산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철도 덕이었다. <2편에 분천역(하) 계속>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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