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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사고를 말랑하게

2019-01-15
[문화산책] 사고를 말랑하게
박현주<달성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호기심을 가질 무렵은 마냥 즐겁다. 그러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기존 질서의 부조리에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기 시작하고 시행착오를 거친다. 서서히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킬 것과 잃을 것들이 생겨나는데, 이렇게 세상에 길들고 나면 더 이상의 변화를 원치 않게 된다. 사람은 일련의 사이클을 거치며 삶에 순응한다. 누구든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이 사이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저항의 시기를 다소 조용하게 넘어간 탓인지,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재미를 의식적으로 간직하려 한다. 요즘 말론 ‘중2병’인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행동으로 표출하기보다 기호에 맞는 대중문화로 대리만족을 얻는 편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가 나왔을 때 또래들은 너나없이 열광했지만, 선생님들은 말세라며 못마땅한 시선으로 혀를 끌끌 찼다. 왜 그 메시지에 아이들이 공감하는지 기성세대는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어보였고, 세대 간 벽은 공고했다. 다수의 청소년은 그렇게 조용히 반항을 문화로 소비했다. 세상의 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문제아로 낙인찍는 세상을 향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조용히 읊조리면서.

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이슈 중 하나는 ‘갑질’이다. 민주화된 현대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의심스러운 충격적 사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덕분에 조용히 수군거리는 용어였던 ‘꼰대’는 조직 내 갑질문화의 선두주자로 지목되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런데 생각해볼 만한 것은 소위 ‘갑질하는 꼰대’도 과거 부조리에 저항하는 시기를 겪었을 것이란 점이다. 모두에게 반항적 청춘을 누릴 권리,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는 후배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주어지건만 그 결과는 왜 천차만별일까.

몇 년 전부터 청년들에게 큰 울림을 주며 ‘시대의 어른’으로 회자된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있다. 그는 ‘그때그때의 해답이 있을 뿐, 정답은 없다’며 자기 합리화를 통해 균형을 잃는 것을 경고한다. 사회와 문화는 늘 완성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를 인정하고 사고를 말랑하게 연마해야만 앞으로 다가올 갑질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다. 이 과정에 예술은 완충지대로 존재한다. 현실의 틈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삶을 재생산한다. 그리곤 정답 없는 여러 시선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너는 틀렸고 내가 정답이라고 고집부리고 싶을 때, 사실여부에 돋보기라도 대볼 용기가 있다면 아직 당신의 사고는 유연하다. 스테이크 굽기 정도와 견주면 미디엄-웰던 쯤이려나. 혹여나 웰던이 되어버렸다면 이 사실을 떠올려 보자. 전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의 시작은 집을 뛰쳐나온 가출 청년이었음을 말이다. 박현주<달성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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