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01207010000976

[지금 왜 다시, 홍의 장군 곽재우인가 .2] 임진왜란 창의의 깃발을 올리다

2020-12-08
  • 가
  • 가
  • 가
  • 가
  • 가

"나라 없으면 목숨이 무슨 소용…" 전재산 털어 최초로 의병 일으켜

2020120701000244000009761
선조실록 27권 4번째 기사에는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초유사 김성일은 "의령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왼쪽)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 마을 입구에 있는 곽재우 신도비. 신도비 북쪽에는 곽재우를 배향하는 예연서원이 들어서 있다.

#1. 임진왜란 발발

임진왜란 개전 초기, 왜군의 기세는 빠르고 날카로웠다. 1592년 4월13일, 조선 침략의 선봉에 나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후 물밀듯이 들어왔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북진을 거듭했다. 왜군의 기세는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파죽지세였다. 조선 관군은 부서지고 무너지며 맥없이 물러났다.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고, 나라의 운명을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호남을 두고 조선과 왜군은 필사적이었다. 곡창지대였던 호남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보급처였고, 전쟁의 승패가 달린 승부처였다. 왜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곧장 호남 진격에 나섰다. 이후 그의 휘하 안코쿠지 에케이가 2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경상도 의령으로 진격했다.

#2. 곽재우, 의병을 일으키다

왜적이 쳐들왔다는 소식은 경남 의령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아이 부녀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인다'는 흉흉한 소문이 곧장 마을을 덮쳤다. 입에 오르고 말로 전해지면서 소문은 살기를 품었다. 급기야 집과 집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더욱 흉흉해져 갔다. 돈 있는 양반들은 몸을 숨기기에 바빴고, 백성들은 공포에 몸서리를 쳤다. 의령에 은거하던 곽재우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벼슬아치든 백성이든 나라의 보살핌을 받은 지 수백 년이다. 나라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데도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하고 임금의 어려움을 돌아보려 하지 않으니 한탄스럽다. 모두가 도망만 친다면 온 나라 삼백 고을에 싸울 남자가 없게 될 것이고, 이 어찌 만고의 수치가 되지 않겠는가?"

그해 4월22일 곽재우는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 집안의 노비 10여 명이 함께했다. 자신의 집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고 치면서 의병을 모았다.

"나라가 없으면 목숨을 부지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제 초야에서나마 일어나야 할 때다."

이웃 양반과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의병은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그 뒤 그의 의병은 2천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파죽지세 왜군에 나라운명 풍전등화
집안 노비 10여명과 함께 의병 모아
이웃 백성들 동참 50명→2천명으로
한때 도둑으로 오인받아 고발되기도
기강서 첫 승리후 정암진 전투 대승
기습·기병 전술로 적 호남진격 막아



무엇보다 곽재우는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이끌었다. 자신의 옷을 벗어 전쟁에 나선 백성들을 입히고, 처자식의 옷을 그들의 처자식에게 입혔다. 그의 의병은 곽재우와 죽기를 각오하고 창의했다. 자발적 지원이었고 차별없는 동지 관계였다.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동지적 결합'이었다.

곽재우의 기의는 호남·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가장 먼저 창의한 것은 의령이 적의 초기 침략지역에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곽재우의 애국심과 실천력이었다.

하지만 첫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곽재우가 전 재산을 내놓았지만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적과 싸울 무기가 가장 문제였다. 곽재우의 의병은 관군이 도망가 비어 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하지만 당시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이를 오해해 곽재우의 의병을 도둑의 무리로 고발하고 말았다. 다행히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후 5월4일과 6일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만나는 기강에서 왜군의 수송선을 두 차례에 걸쳐 쫓아내며 첫 승전보를 알렸다.

2020120701000244000009762
대구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에 자리한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켜낸 영남지역 의병들의 신위를 모셔둔 곳이다.

#3. 정암진 전투

마침내 5월24일, 곽재우의 얼굴에는 결의가 느껴졌다.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그의 모습은 비장했다.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칭하며 결의를 다졌다. 곽재우가 전투 중에 항상 입은 붉은 옷은 그가 중국에 들렀을 때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날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는 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의령으로 들어왔다. 선봉은 이미 정암진에 도착해 남강을 건널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늪지대가 많아 여의치가 않았다. 왜군의 선봉은 길잡이를 동원해 마른 땅을 골라 말뚝을 박았다. 날이 밝으면 본대가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곽재우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척후병은 전날 그 소식을 빠르게 알려왔다. 곽재우는 밤중에 장사들을 거느리고 말뚝을 뽑아 늪지대 방향으로 옮겼다. 그리고 의병들을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왜군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의심하지 않고 말뚝이 박힌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밤 사이 옮겨진 사실도 모른 채였다. 결국 왜군은 질퍽한 늪지대에 빠지고 말았다.

곽재우의 역습은 민첩하고 빨랐다. 날 선 칼날이 바람을 매섭게 갈랐고, 칼을 받은 적은 늪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죽은 자의 몸에서 쏟아진 피가 늪을 타고 흘렀다. 역습에 당황한 왜군은 맥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곧바로 본대가 들이닥쳤다. 곽재우는 적은 수의 병사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날쌘 장수 10여 명을 뽑아 적을 유인하게 했다. 자신처럼 붉은 옷과 백마를 타게 한 후 북을 치며 적진의 좌우로 내달렸다. 왜군은 붉은 옷을 입은 장수들이 곽재우인 줄 알고 뒤를 쫓았다. 10여 명의 장수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였다. 산속에서 혹은 언덕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며 교란시켰다. 왜군은 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쪽 산에서 나타났다 갑자기 반대편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곽재우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 틈을 타 곽재우는 왜군을 좁은 길로 유인했다. 그리고 활을 쏘며 기습했다. 화살을 맞은 적은 땅바닥에 쳐박혀 버둥댔다. 화살이 관통한 적군의 목에서는 붉은 피가 솟구쳤다. 아군의 화살은 정확하게 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왜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곽재우의 기병 전술과 기습은 주효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곽재우 의병의 정암진 전투 승리로 왜군 제6진은 호남 진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보급로를 막는 값진 승리였다.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을 건너 호남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재우의 공이다.'(선조실록)

'재우가 군사를 정진강 오른쪽에 머물도록 하니 하도(충청·전라·경상도)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선조수정실록)

정암진 전투는 곽재우의 가장 큰 업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망우당 곽재우,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21. 조선왕조실록.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