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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어린아이의 죽음과 그 흔적

2021-02-05

어린아이 곁엔 금동관과 장난감, 순장된 유모까지…생전 지위 내세에도 이어질거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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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어린이 보호구역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사건이 발생해 일명 '민식이법'이 작년에 시행되었는데, 최근에는 '정인이 사건'이 발생해 온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필자도 두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로서 이러한 어린아이 죽음을 대할 때면 가슴이 참 먹먹해지고 화가 치민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과 법률 개정이 조속히 이뤄지길 바라며 2021년 새해에는 제발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오늘은 이 사건과는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던 어린아이의 죽음과 장례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이라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겠지만,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어린아이의 죽음은 어렵잖게 목격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산아(死産兒)도 많았고 홍역과 같은 역병이나 여러 사고로도 죽음에 이르렀기에 옛 어른들 중에는 아이를 1년(심지어 2~3년) 사고 없이 자라야만 호적에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 민속학 논문에 따르면 이러한 비정상적인 죽음에도 나름의 의례를 따랐으며 전통 마을에는 죽은 어린아이를 매장하는 장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일반 매장지와는 구분돼 애장터, 애총, 아장살, 애기당묘, 애기당 등 '애(아)'가 들어가는 명칭으로 불리거나 마을 뒷산의 '직골'이란 곳이 아이를 매장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이해하기도 했다.

이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사회에는 어떠했을까. 우리 지역 고분에도 그 주인이 어린아이인 경우가 다수 있는데, 어린아이의 무덤에는 옹관묘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경남 김해 예안리유적의 옹관묘에는 3세 이하의 유아가, 사천 늑도유적에서 출토된 옹관묘에서는 1~2.5세 정도의 유아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발굴 당시 출토된 인골을 통해 확인된 것이어서 그 신빙성이 크다 할 수 있다.

경북 경주 대릉원 내에 위치한 큰 고분 중 1924년 일본인 학자 우메하라(梅原末治)가 발굴한 금령총의 주인도 어린아이로 추정된다. 발굴된 부장품 가운데 금관의 크기가 작고 주피장자가 착장한 장신구의 출토 범위가 좁아 이 무덤의 주인을 어린아이, 즉 왕자로 보았다. 특히 이 고분에서는 기마인물형토기 한 쌍이 출토되었는데 마치 말을 타고 영혼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형상을 갖추고 있어 신라인의 내세관과 연결되는 중요한 유물로 주목되었다.

경주 대릉원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
금관 크기·장신구 작아 '왕자'로 추정
내세 여행하는 듯한 인물토기도 발견
신라인 사후세계관 알리는 중요자료

사진 1. 금령총 출토 기마인물형토기(출처 문화재청)
경산 조영동 EⅢ-8호분도 어린아이
생전 사용했을 장신구·장난감 등 출토
부장된 금동관 통해 아이 신분 짐작
고대사회에도 세습 지위 존재 확인

필자가 주로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경북 경산 조영동고분군의 EⅢ-8호분(사진 1)의 주인공도 어린아이다. 주곽에서는 2명의 피장자를 겹쳐 매장했는데, 이 중 아래쪽에서 확인된 3~5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주피장자로 두개골 일부만 남아 있었다(사진 2). 어린아이(주피장자)는 금동제 태환이식(굵은 고리 귀걸이)과 곡옥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맡에는 고배·연질발·장경호 등의 제의용 토기들이 부장되어 있었는데, 이 장경호 안에는 여러 종류의 토구·석구·토제유희구 등이 들어있었다(사진 3). 이 주피장자 바로 위에 15세 전후의 순장자(사진 4)를 주피장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매장했고 그 위에 금동관이 부장돼 있었다(사진 5).

이를 통해 볼 때 이 무덤의 주피장자인 어린아이는 사고나 질병 등으로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고, 생전에 이 아이를 돌보던 유모를 함께 순장해 내세에서도 보살피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생전에 어린아이의 신분을 상징하던 화려한 장신구를 함께 착장한 채 매장했으며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던 돌이나 흙을 구워 만든 장난감들을 각종 제사유물과 함께 부장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와 순장자, 각종 유물이 다 부장되고 난 다음 이 아이의 아버지는 그가 쓰던(어쩌면 이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했을…) 그 금동관을 함께 넣으면서 자식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경주와 경산 고분에서 보듯이 어린아이의 비정상적인 죽음과 아이를 위한 특별한 장례 과정을 통해 고대 사회에도 이미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귀속지위, 즉 이 아이의 능력이나 업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신분에 의해 계승된 지위가 존재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수준 또한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경산 조영동고분군에는 출산 시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와 엄마가 함께 매장된 사례도 확인된다. 조영1A-6호분은 동서 길이 238㎝, 너비 60~63㎝ 정도의 크기의 주곽을 마련하고 그 서쪽에 작은 부곽을 설치한 고분이다. 발굴 당시 고분 안에는 비교적 양호한 수준의 인골 1구가 머리를 동쪽으로 둔 상태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최근 이 인골에 대한 정밀 분석 결과, 21~35세 정도의 여성으로 추정되었으며 대퇴골과 경골에 외골막염이 확인되었고, 치아는 생전에 일부 결손되었으며 충치나 치관이 탈락한 흔적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인골과 함께 발굴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열 달 남짓 성장한 태아뼈가 함께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젊은 나이의 여성 인골은 엄마로, 이와 함께 확인된 태아뼈는 그녀의 아이로 추정할 수 있는데 출산 시 또는 출산을 전후한 시점에 엄마와 아이가 함께 죽어 매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출산 사고는 각종 문헌자료나 조선시대 무덤에서 확인된 사례가 있으나 고대 사회에서는 처음 확인한 고고학 성과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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