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논설위원
'원전 8기 대미(對美) 투자, 대구경북과 무관한 게 아니다.' 최근 영남일보 사설 제목이다. 전체 대미 투자금 2천억 달러 중 60%인 1천200억 달러가 원전에 투입된다. 첫 투자 사업인 엔시날 가스복합화력발전소 투자액의 다섯 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게 대구경북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사설은 한수원 본사(경주)가 있는 대구경북은 국내 원전 산업의 중심지로서 미국 원전 프로젝트의 최대 수혜지역이 될 잠재역량을 갖추고 있으니 관심 갖고 준비하자는 내용이었다. 주의를 환기했음에도, 지역 내부에서 이 프로젝트가 대구경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석하고 대비한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이게 달나라 얘기가 아니다. 대구경북, 우리의 문제다. 마치 삼정(三鼑)처럼 TK 원전 산업을 떠받치는 3개의 기둥이 있다. 첫째 APR1400, 둘째 한수원과 한국전력기술, 셋째 국내 최대·최고의 원전 생태계가 그것이다.
APR1400부터 보자. 한국이 독자 개발한 3세대 가압경수로형 원전이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설계인증까지 받았다. 미국 외 국가가 개발한 원전이 NRC 설계인증을 받은 첫 사례다. 이 덕에 미국 원전 건설 시 복잡한 추가 기술심사가 불필요하다. 첫 원전인 고리 1호기를 지은 지 약 50년 만에 텃세 강한 미국에 원전을 역수출하는 유일한 국가가 됐다. APR1400에서 가장 중요한 게 '설계'다. 한국전력기술 <주>의 작품이다. 본사가 김천에 있다. 기자재 공급은 두산에너빌리티, 시공은 현대건설, 정비는 한전KPS 등이 핵심 역량을 보유한다. 한수원은 조달·건설·시운전·운영을 주도하고,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식재산권 협정 개정 협상에 참여해 미국 진출 기반을 닦는 역할을 맡을 것이다. 팀코리아의 중심축이다. 대미 원전 프로젝트의 두 기둥 한수원과 한국전력기술 모두 경북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두산에너빌리티와도 무관하지 않다. APR1400과 미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두 노형(爐型) 모두에 기자재를 공급할 역량을 지니고 있다. 주식시장이 이 회사를 주목하는 이유다. 가까운 창원에 소재한 두산에너빌리티는 다수의 대구경북 협력업체와 공조하고 있다. G정공·K정기·Y테크윈·Y기술 등이 주요 파트너다. 이들은 원전 주기기 제작·정밀부품·계측기·설계 및 자재 공급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산과 함께 원전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구경북에는 가동 중인 원전만 13기에 이르고 조만간 17기까지 확대된다. 최대 원전 집적지다. 한수원·한국전력기술은 물론 국내 유일의 방사성폐기물관리 전문 공공기관인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원전 R&D 거점 문무대왕과학연구소, 원전 소부장 기업이 집적한 최초의 SMR특화 국가산단, 그리고 대구 및 인접 경북지역에 우수한 기계·부품·소재 산업 인프라와 연구 인력이 존재한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원전 기술국이다. 미국의 최적, 혹은 유일한 원전 파트너는 한국이다. 한국의 최대 원전 생태계를 갖춘 곳이 대구경북이다. 개체가 군집을 이룰 때 창발성(創發性·Emergence)이 나타난다. AI 시대 전력전쟁이 시작된 지금, 미국의 원전 부활은 TK 원전 산업 대도약의 기회다. 모든 기회가 저절로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진 않는다. 바람은 모든 이의 돛을 스치고 지나가지만, 노를 쥘 줄 아는 이의 배만이 미지의 섬에 닿는다. 1천200억 달러 대미 원전 투자가 여전히 먼 나라 얘기인가. 아직 실감 나지 않는다면, '배를 만들고 싶다면 나무를 모으게 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광활하고 끝없는 바다를 동경하게 하라'(윌리엄 제임스·19세기 미국 사상가)는 격언으로부터 먼저 영감을 얻어라.
이재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