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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 음악감상실 ‘녹향’ 80주년…청음문화는 어떻게 변했나

2026-10-1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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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향, 관광지로 주목…역할 모호해
‘하이마트’ 2030 세대 고객층 늘어
턴테이블 조작하는 LP 카페도 인기
“아날로그 유행하며 가치 재발견돼”

1946년 10월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 음악감상실 녹향(綠香)이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대구 중구 향촌문화관 지하에 위치한 녹향 감상실 내부 모습. 정수민기자

1946년 10월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 음악감상실 '녹향(綠香)'이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대구 중구 향촌문화관 지하에 위치한 '녹향' 감상실 내부 모습. 정수민기자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초, 대구의 클래식 음악감상실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준 안식처였다. 당시 미국 음악잡지 '에튜드(Etude)' 1953년 10월호에 실린 '코리아 콘체르토' 기사 속 묘사처럼, 사람들은 전쟁통에도 감상실에 모여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들으며 위안을 얻었다.


그 중심에는 올해 80주년을 맞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 음악감상실 '녹향(綠香)'이 있었다. 개관 70주년을 바라보는 '하이마트'와 함께 대구의 음악감상실 역사를 이어온 양대 산맥이다. 1980년대 이후 가정마다 음향기기가 보급되며 수많은 음악감상실이 문을 닫았지만, 두 곳은 저마다의 생존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21세기에 들어서 음악 감상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신청곡을 듣고 감상을 나누는 반면, 같은 공간에서도 나만의 취향을 찾아 오롯이 몰입하기도 한다. 대구에서 오랜 기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고전 음악감상실부터 신생 LP 카페까지를 통해 청음문화의 변화를 추적해봤다.


녹향 2대 운영자 이정춘 씨가 DJ BOX 내부에 있는 LP 진열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수민기자

'녹향' 2대 운영자 이정춘 씨가 DJ BOX 내부에 있는 LP 진열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수민기자

1980년대 발행한 녹향 티켓. 당시 불황을 겪으며 수량이 많이 남았고, 지금까지 해당 티켓을 사용 중이다. 정수민기자

1980년대 발행한 '녹향' 티켓. 당시 불황을 겪으며 수량이 많이 남았고, 지금까지 해당 티켓을 사용 중이다. 정수민기자

◆올해 80주년 '녹향'…"살아 숨쉬는 공간 되길"


녹향은 1946년 10월 고(故) 이창수 선생이 대구 향촌동 자택 지하실에 축음기 한 대와 SP 레코드 500여 장을 들여놓으며 시작됐다. 음악 동호회 '예육회(藝育會)'와 함께 출발한 이곳은 한국전쟁 때는 피란 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됐고, 양명문 시인이 '명태'를 남기기도 했다. 1958년 남일동으로 이전하면서 땅을 팔아 어렵게 마련한 영국산 스텐토리안 스피커를 들이며 LP 스테레오 감상실의 면모를 갖췄다.


1960년대 후반에는 200석 규모로 확장하며 팝송을 병행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휴대용 음향 기기가 보급되면서 손님이 끊어지며 폐업 위기에 내몰렸다. 그럼에도 이창수 선생은 365일 자리를 지켰다. 부친의 뒤를 이어 2대째 녹향을 운영하는 셋째 아들 이정춘 씨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찾아올 손님이 없어도 내내 자리를 지키셨다"고 회고했다. 말년까지도 자리를 지키던 이창수 선생은 2011년 작고했다.


그 뒤 화정동에서 운영을 이어가던 이 씨는 2014년 대구 중구청의 제안으로 현재 위치인 향촌문화관 지하로 공간을 옮겼다. 현재 6천여 장의 음반 중 60%는 이 씨가 사서 모은 것이다. 대구중구도심재생문화재단을 통한 위탁 운영으로 공간은 보존하고 있지만, 관람객이 북적이는 감상실로서의 역할은 모호해졌다. 이 씨는 "노출형 천장 탓에 방음이 취약하고 관람객들의 발길이 수시로 이어져 감상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방문객 중에는 간혹 가요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지만, 녹향에서는 정통 클래식이 우선이다. 그를 증명하듯 고전 클래식을 감상하는 음악 공동체의 맥은 이어지고 있다. 옛 간판에도 새겨진 '예육회'와 대학생 음악 동호회 '에스텔라'를 비롯한 6~7개 모임이 여전히 이곳에서 정기 감상회를 연다.


올해로 개관 80주년을 맞았지만, 이를 기념하는 행사나 사업은 아직 확정된 게 없다. 고 이창수 선생 15주기와 함께 시도하려고 했지만 주변으로부터 동력을 얻지 못했다. 이를 기념할 만한 녹향과 관련된 기록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1950~70년대 티켓 실물과 당시 사진들은 대부분 유실된 상태다. 그는 "앞으로 음악회 등을 진행할 예정이며, 내년에는 재단의 관심 속에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 씨는 훗날 녹향이 과거에 멈춘 박물관보다 LP판이 계속 돌아가는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는 "낡은 음향 기기가 주는 향수도 좋지만, 이 공간이 지속되려면 현대적인 음향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그래야 녹향이라는 이름이 온전하게 지켜지고, 이곳에 항상 음악이 흐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관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하이마트 내부 모습. 정수민기자

개관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하이마트' 내부 모습. 정수민기자

하이마트 음악 감상실 입구. 정수민기자

'하이마트' 음악 감상실 입구. 정수민기자

◆2030 세대 사이 '레트로 감성 명소'된 하이마트


반면 하이마트는 최근 2030 세대 사이에서 '힙한' 공간이 됐다. 1957년 5월 고(故) 김수억 선생이 문을 연 이곳의 이름은 독일어로 고향을 뜻하는 'Heimat'에서 유래했다. 이름처럼 전쟁 후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 되어 주었던 이곳은 창업주 부부와 2대 김순희 선생을 거쳐, 현재는 3대 박수원·이경은 부부가 대를 잇고 있다.


분위기는 녹향과 사뭇 다르다. 감상실 내부 한편에 있는 6m 크기의 부조상 '불멸의 음악가상'이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스피커에서는 클래식뿐 아니라 최신 팝과 가요가 흐른다. 객석 곳곳에는 젊은 연인이나 혼자 음악을 즐기는 청년들이 자리를 채운다. 수십 년간 신청곡을 적던 녹색 칠판은 인테리어로 존재했고, 입장 티켓 뒷면에 각자 신청곡을 적어 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생존을 위한 고민 끝에 나왔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만을 고수했지만,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라는 창업주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가능성을 열었다. 박수원 대표는 "과거의 방식만 고집하다 공간 자체가 의미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를 느꼈다"며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어떤 사명감으로 문화를 바꾸자고 외치기보다 현 시대에 잘 자리 잡아야 앞으로도 건재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방향성을 바꾼 뒤로는 젊은 세대가 많이 찾는다. 특히 수십 년의 세월이 빚은 독특한 감성은 SNS를 통해 '레트로 감성 명소'로 주목받았고, 타지에서 홀로 찾아와 몇 시간씩 머물다 가는 손님도 부쩍 늘었다. 박 대표는 "할아버지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신 '나눔' 정신에 동감한다"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로서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중구에 위치한 LP 카페 바이닐바이브. 손님이 직접 LP 판을 골라 바늘을 얹어 음악을 감상하는 능동적 경험을 제공해 실내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정수민기자

대구 중구에 위치한 LP 카페 '바이닐바이브'. 손님이 직접 LP 판을 골라 바늘을 얹어 음악을 감상하는 능동적 경험을 제공해 실내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정수민기자

◆레트로를 찾는 청년들…청음문화도 '경험 소비'


이렇듯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 품은 레트로 감성에 대한 수요는 도심 곳곳 'LP 카페'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2024년 5월 문을 연 '바이닐바이브'는 기존 음악 감상실과 달리, 좌석마다 턴테이블과 헤드폰이 비치돼 있는 대구 최초 턴테이블 식음료 공간이다. 손님이 직접 LP 판을 골라 바늘을 얹어 음악을 감상하는 능동적 경험을 제공해 실내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방탈출 카페를 운영하던 김휘남(33) 대표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놀이를 고민하다 이 공간을 구상하게 됐다. 그는 "다함께 음악을 공유하는 기존 음악감상실과 달리 원하는 곡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며 "특히 턴테이블을 직접 다룰 수 있다는 점이 그들 취향에 부합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러한 고객층의 수요에 맞춰 매장에는 클래식보다 팝 아티스트와 K-pop 장르의 LP가 더 많았다.


LP 컬렉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창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다던 김 대표는 "바늘이 LP 판의 홈을 읽으면서 발생하는 진동이 음악으로 변하는 과정을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즐기는 것 같다"며 "소리만 듣는 디지털 음원에 비해,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가는 LP판을 관찰하고, 직접 바늘을 올리며 조작할 수 있는 경험을 주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십 년 된 고전 음악 감상실이 주목받고 새로운 LP 카페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경험 소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특성에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2030 세대의 레트로 열풍은 아날로그적인 소재들을 발굴하고 향유하는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오래된 고전음악 감상실도 재발견되는 것"이라며 "디지털 음원이 아닌 고전 매체를 통해 온전히 음악을 감상하는 경험으로 위안을 얻고, 이러한 경험을 SNS로 인증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LP 카페 바이닐바이브에서는 직접 LP 판을 골라 턴테이블로 재생할 수 있다. 정수민기자

LP 카페 '바이닐바이브'에서는 직접 LP 판을 골라 턴테이블로 재생할 수 있다. 정수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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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민

공연장 지박령. 지역의 문화·예술 이야기를 구석구석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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