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松下 백영일
반듯한 글씨엔 숙종임금의 마음이 어려있다
‘명필 임금’ 숙종이 인정한 명필 이진휴의 글씨…중후한 필치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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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는 전통 목조건물로는 최대 규모인 화엄사 각황전(구례군 마산면 황전리·국보 제67호). 1702년에 중건된 건물로 ‘각황전(覺皇殿)’은 당시 숙종이 이름을 지어 하사한 사액(賜額) 편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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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3년(계미년) 여름에 형조참판 이진휴가 썼다는 낙관 글씨가 있는 ‘각황전’ 편액. 이진휴는 당대 명필로도 유명했다. |
구례 화엄사의 중심 전각인 각황전은 처음 보게 되면 누구나 감탄사가 나올 만한 목조 건물이다. 그 규모와 장엄함, 아름다움, 고색창연함 등 모든 면에서 그렇다. 각황전은 우리나라 사찰 옛 목조 건물 중에서는 가장 거대하다. 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장중하고도 세련된 기품, 그리고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1702년에 완공된 현재의 각황전(국보 제76호)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2층의 건물이지만, 내부는 툭 트여 있는 통층으로 돼 있다. 이런 양식의 우리나라 사찰 건물로는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 공주 마곡사 대웅전 등 몇 개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하다.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건물의 위층 처마에 이 건물에 어울리는, 중후한 필치의 편액 ‘각황전(覺皇殿)’이 걸려 있다. 보기 드물게 큰 글씨의 편액으로, 글씨와 바탕색이 거의 다 바랜 모습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며 건물을 더욱 멋져 보이게 하고 있다. ‘각황전’이란 전각은 다른 사찰에는 없는 이름의 전각이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이 지어지고 특이한 전각 이름을 갖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전하고 있다.
◆조선 숙종이 전각 이름을 하사하고 건물을 짓게 한 각황전
각황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중수하면서 처음 전각을 지었을 당시는 석가모니의 등신불(等身佛)만한 황금 부처상인 장육존상을 봉안하고, 벽에는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두르고 ‘장육전’이라 불렀다. 부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말한다. 당시에는 금색 장육불상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 장육전은 다른 전각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다. 이후 1636년 대웅전이 중건되고, 장육전은 1702년(숙종 28)에 중건되었다. 장육전 완공 후 숙종 임금은 이 전각에 ‘각황전’이라 사액했다. 숙종이 전각을 중건하고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린 것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장육전이 불탄 뒤 그 재건을 고민하던 벽암 스님은 제자인 계파 스님에게 중책을 맡겼다. 계파 스님은 중건 불사 성취를 위해 대웅전에서 100명의 스님이 백일기도를 올리게 했다. 자신은 기도승을 시봉하는 공양주(供養主)를 자원해 밥 짓고 물을 기르며 기도승들을 봉양했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한 노장 스님이 말했다. “지난밤 꿈에 하얀 노인이 나타나 장륙전 중건을 위한 화주승(化主僧)은 물 묻은 손으로 밀가루를 만져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는 사람으로 삼으라고 일러주었소.”
이에 따라 모든 스님에게 차례로 손을 물에 넣었다가 밀가루를 만져보게 했다. 그러나 밀가루가 묻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계파 스님이 시험해 본 결과 밀가루가 손에 묻지 않았다.
계파 스님은 할 수 없이 화주승을 맡게 되었으나 수행만 했던 터라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래서 그날 밤 대웅전에서 밤새도록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대는 내일 아침 바로 화주를 위해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말했다.
스님은 용기를 얻어 날이 밝자 지체 없이 일주문을 나서 마을 어귀로 향하는데, 뜻밖에도 마을 일대를 돌아다니던 걸인 노파가 절을 향해 오고 있었다. 스님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나 노파에게 간곡하게 시주하기를 청했다. 계파 스님의 청을 들은 노인은 한동안 멍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더니, 화엄사를 향해 합장하고는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 큰 불사를 이룩하겠으니 문수보살이여, 가피를 내리소서”라고 한 뒤 길 옆의 늪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스님은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고 죄책감을 못 이겨, 그 길로 전국을 떠돌다가 5년 후에는 한양까지 가게 되었다. 하루는 창덕궁 앞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어린 공주와 마주쳤는데 공주가 스님을 보더니 반가워하며 달려와 누더기자락에 매달렸다. 그리고 태어난 이후 한쪽 손을 한 번도 펴지 않았던 공주는 스님이 그 손을 만지자 손을 폈다. 그 손바닥에는 ‘장륙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거지가 공주로 환생했던 것이다.
이 일을 전해들은 숙종은 스님을 대궐로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었고, 이에 감동한 임금은 장륙전 중건을 명했다. 그리고 전각 이름도 ‘왕을 깨우쳐 전각을 중건하게 했다’는 의미로 각황전으로 바꾸도록 했다. 이는 전해오는 이야기다. 각황전 상량문 기록에 의하면, 각황전은 숙종의 아들로 나중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그 모친인 숙빈 최씨가 대시주자인 것으로 되어 있다.
◆각황전 편액은 당대 명필 이진휴 글씨
각황전 편액 글씨는 성재(省齋) 이진휴(1657∼1710)가 썼다. 그가 어떻게 이 편액 글씨를 썼을까. 숙종은 자신도 글씨를 잘 썼고, 칠곡 송림사 ‘대웅전’ 편액 등 그가 썼다는 편액 글씨도 남아 있다. 성재는 당대의 명필이고, 숙종 또한 그의 글씨를 인정했기 때문에 쓰게 했을 것이다.
12개의 판자를 이어 만든 편액은 흰색의 글씨 부분을 제외한 바탕색이 다 바래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테두리 부분은 푸른색으로 칠한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반듯하고 묵직한 해서체 글씨 왼쪽에 ‘계미맹하 형조참판이진휴서(癸未孟夏 刑曺參判李震休書)’라는 낙관글씨가 비교적 크게 쓰여 있다. 계미년은 1703년.
글씨를 쓴 성재 이진휴는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특히 서예에 뛰어났다.
순천 ‘조계산선암사중수비(曹溪山仙巖寺 重修碑)’, 양산 ‘통도사사리탑비(通度寺舍利塔碑)’, 여수 ‘영취산흥국사중수사적비(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碑)’, 상주 ‘지추김식비(知樞金湜碑)’, 광주의 ‘예판이증비(禮判李增碑)’ ‘찬성이상의비(贊成李尙毅碑)’ 등 비문글씨를 특히 많이 남겼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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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아들인 의창군 이광(李珖)이 1636년에 쓴 화엄사 ‘대웅전(大雄殿)’‘지리산화엄사(智異山華嚴寺)’ 편액. 그의 편액 글씨는 인기가 있었고, 특히 ‘대웅전’은 여러 사찰에 번각돼 걸리기도 했다. |
사찰에 왕자의 글씨 편액을 건 까닭은?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1589∼1645)은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의 여덟번째 서자(庶子)로, 호를 기천(杞泉)이라 했으며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그는 판서를 지낸 허성(許筬)의 딸과 혼인했는데 1618년(광해군 10) 처족 허균(許筠)의 모반죄에 연루돼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인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의창군은 글씨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글씨 중에서도 부친인 선조가 즐겨 썼다고 하는 한석봉체의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 대자(大字)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쓴 사찰 편액 글씨는 인기가 높았다. 그 대표적 사찰 편액 글씨가 화엄사의 ‘대웅전(大雄殿)’ ‘지리산 화엄사(智異山華嚴寺)’다. ‘대웅전’ 편액에는 ‘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글씨가 있어, 의창군이 1636년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일주문에 걸린 ‘지리산화엄사’ 편액에는 ‘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의창군광서(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낙관 글씨가 있다.
화엄사 ‘대웅전’ 편액 글씨는 다른 사찰에서도 많이 번각해 사용했다. 화엄사 근처에 있는 하동 쌍계사의 ‘대웅전’ 편액도 보면 화엄사 ‘대웅전’ 글씨를 번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엄사 편액과는 달리 의창군의 낙관 글씨 없이 ‘대웅전’ 글씨만 한 자씩 모각했다.
예산 수덕사와 정읍 내장사에 걸려 있던 ‘대웅전’ 편액과 완주 송광사, 서울 진관사, 서울 선학원 등의 ‘대웅전’ 편액도 그의 글씨다.
그의 편액 글씨는 글씨 구조가 짜임새가 좋고 운필이 청수(淸秀)한 해서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글씨라는 평도 듣지만, 숭유억불 정책으로 고통을 당하던 사찰 입장에서는 왕자의 글씨 편액을 걸어놓음으로써 탐관오리 벼슬아치의 횡포를 최소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화엄사의 벽암 스님도 인조 임금의 숙부인 의창군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받아 화엄사의 불법이 영원하길 염원하며 편액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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