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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구성면 모성정과 성산여씨 하회택

2014-11-28

안개…달빛…저녁놀…솔바람
정자에 오르면 네가지 풍경에 넋을 잃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구성면 모성정과 성산여씨 하회택
상좌원리의 모성정. 바위의 글자 ‘초당이선생장구지소’는 후손인 학산 이현기가 1929년에 새긴 것이라 한다.

저 바위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맑은 천이 흐르다 머문 깊은 소가 있을까. 모성정의 사진을 처음 보고 그리 궁금해 했다. 저 집은 60칸이었다지. 지금은 정침과 사당만이 남았지만 온유한 단정함이 배어있구나. 성산여씨 하회택의 사진을 처음 보고 그리 생각했다. 궁금한 생각에 닿았던 길, 돌아오는 마음이 확인한다. 영속하는 것들에게 변화는 필연일지언정,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마음은 불변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구성면 모성정과 성산여씨 하회택
모성정 앞을 흐르는 하원천. 상좌원리 입구에서 감천과 합수해 낙동강으로 간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구성면 모성정과 성산여씨 하회택
모성정 주변에는 고(故) 이석균과 고 이경균의 건국포장을 비롯해 많은 비석이 자리한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구성면 모성정과 성산여씨 하회택
광명리 성산여씨 하회댁. 60여칸의 대저택이었으나 대문간, 정침, 사당만 남아 있다.


◆ 효자 이장원의 정자, 상좌원리 모성정

도로다. 모성정(慕聖亭) 바위 아래에 있는 것은. 그것은 이기적으로 실망해야 할 일이었고, 어쩐지 좀 난처했다. 천은 도로의 저편에서 좁고 낮게 흘렀다. 정자에 올라 보았다. 영묘한 소나무 사이로, 도로는 지구의 흠집처럼 신경을 긁었다. 쯧쯧, 굳이 바짝 내려다보는 알량한 시선의 고집이라니.



모성정은 상좌원 출신의 학자인 초당 이장원(1560~1649)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인 학산 이현기가 1929년에 세운 우모정에서 유래한다. 남인에 속했던 초당 이장원은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 동계 정온 등과 의리로 벗하였으며 이름난 효자였다 한다.



7세에 어머니를 잃은 이장원은 3년간 묘 옆의 여막에 기거하며 흰 죽만 먹었다 한다. 가난하였으나 아버지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끊이지 않게 했으니, 임진년 왜란을 피해 아버지를 업고 떠난 길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따르며 호위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묘를 하는 동안 묘역의 소나무는 3년간 잎이 나지 않았고, 탈상을 하고나서야 잎을 피웠다 한다.



모성정이 있는 자리는 이장원이 글을 읽고, 목욕하고, 바람을 맞으며 거닐던 곳이다. 그때 이곳은 굴암이라 했던 모양이다. 이후 1697년에 그의 장손인 회산 이진영이 모성암이라 고쳐 부르고 바위에 새겼다.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초당 선생에 대한 흠모는 이어져 20세기 초 학산 이현기는 바위에 ‘초당이선생장구지소’ ‘경앙대’라 새기고 우모정을 세웠다.



그 당시 ‘초당이선생장구지소’가 새겨진 바위 아래에 소로가 있었고, 바위의 좌측 옆으로 커다란 너럭바위가 천 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한다. 우모정은 그 너럭바위 위에 화강석 기둥을 올려 세운 정자였다. 시간이 흘러 우모정이 퇴락하자 1949년 후손들은 힘을 모아 새로이 정자를 지어 올렸는데, 그것이 모성정이다. 정자에서 본 네 가지 풍경이 전해진다. ‘물결처럼 보이는 자욱한 안개’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 ‘낮게 드리운 저녁놀’ ‘나뭇가지를 흔드는 솔바람’이 그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내내 활터라 불렀다 한다.



1991년 소로가 확장되었다. 도로다. 정자는 바위 위로 옮겨졌다. 그 모습이 발목이 묶인 새의 근심 어린 이마처럼 느껴진다. 선생의 시대, 사림들의 내심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초당 선생은 이렇게 썼다. ‘충효밖에 할 일이 없으니/ 굴암 변에서 헛되이 늙었도다.’



◆ 독립운동가 여환옥의 집, 광명리 성산여씨 하회택

옛날 직강 공사를 하기 전, 감천은 광명리 전체를 폭 안고 흘렀다 한다. 안긴 땅의 한가운데에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의 한 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어떤 풍수가는 그 땅이 태극의 형상이라 했고 그 나무가 태극의 중앙이라 했다. 명당이란 뜻이다. “그 나무가 버드나무 종륜데, 한 150~200년은 족히 됐을 게요. 병자년 수해 때 집들 다 떠내려가고 사람도 많이 죽었지요. 그때 살아남은 나무라오.” 광명리 여정동 이장님 말씀이다.



나무는 살아남았다. 주변은 모두 논이다. 나무 앞의 농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마을에 닿는다. 그 자리에 ‘성산여씨 하회택’이 있다. 18세기 초 성산여씨 15세손인 여명주가 지은 집이라니 이 역시 수해를 겪은 집이다. 60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1870년 농민 항쟁을 겪고 1936년의 수해에 꺾여 지금은 정침과 사당, 대문채만 남아 있다. 철 대문 안 마당 한쪽에 서있는 대문채는 헛간으로 쓰이고 있고, 그 오른쪽 후면에 정침이 단정하게 자리한다. 그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여환옥의 생가다. 어릴적부터 그의 영민함과 기상은 대단했고 6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해박했다고 한다. 그는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내 요인 중 한 명이었고, 재산을 털어 교육 사업을 펼쳤으며, 집과 토지를 담보 삼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정침의 오른쪽 외벽에 작은 가건물이 하나 붙어 있다. 현재 소유자의 살림인 듯하다. 정침의 건물 자체에 살림살이의 흔적은 크지 않았고, 사람의 손길로 영속되어지는 단정함이 돋보였다. 담장 가에는 노랗게 잘 익은 모과가 이파리들과 함께 뒹굴고 있다. 모과를 거두는 일상은 없어도 집을 보살피는 마음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김천IC에 내려 3번 국도를 타고 구성면 방향으로 간다. 약 8㎞쯤 가다 조마 방향으로 좌회전해 직진한다. 왼쪽으로 논 가운데 정자나무가 보이는 곳이 광명리다. 정자나무와 정면으로 보는 집이 성산여씨 하회택이다. 3번 국도를 타고 계속 직진해 구성면 사무소 지나 직지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상좌원리다. 마을을 통과해 조금 가면 도로 우측에 모성정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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