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0228.010030746300001

영남일보TV

[대한민국의 저력, 우리는 대구 경북인] 독립운동 중심에 섰던 ‘경북人’…전국 3대 명문家 중 2곳 배출

2015-02-28
[대한민국의 저력, 우리는 대구 경북인] 독립운동 중심에 섰던 ‘경북人’…전국 3대 명문家 중 2곳 배출
왕산 허위
[대한민국의 저력, 우리는 대구 경북인] 독립운동 중심에 섰던 ‘경북人’…전국 3대 명문家 중 2곳 배출
석주 이상룡

독립운동의 중심엔 우리 대구·경북인이 있었다. 정부가 현재까지 발굴해낸 독립유공자 1만3천403명 중 대구·경북 출신은 2천36명으로 전국 최다 수준을 자랑한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몸담은 이른바 ‘독립운동 3대 명문가’ 중 2개 가문도 우리 지역에서 배출됐다. 구미출신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 선생(1854년 4월1일~1908년 9월27일)의 가문과 안동출신 석주 이상룡 선생(1858년 11월24일~1932년 5월12일)의 가문이다.

구미출신 왕산 허위 선생

전국 13도 연합의병 창의군 결성
서울진공작전 펼치다 체포돼 순국

◇…왕산 허위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을 끌어모아 ‘전국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을 결성한 항일의병장이다. 13도 연합의병을 모은 허위 선생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의 일제통감부 공략작전을 결정했다.

허위 선생은 선발대의 선봉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전진했지만, 일본군의 역습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잔꾀에 능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허위 선생의 13도 연합의병은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다니던 허위 선생은, 다시 의병대를 집결해 총대장으로 활동했지만, 1908년 결국 경기도 연천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서대문 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허위 선생은 끝내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일본인에게 최초로 사형을 집행당한 순국자로 후세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안동출신 석주 이상룡 선생

무관학교 세워 독립군·참모 양성
만주 동포들 애국계몽에도 헌신


◇…석주 이상룡 선생은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사상가다. 평생 명예와 부가 보장된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나라를 위한 삶을 택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조상의 위패를 땅에 파묻고, 노비문서를 불에 태워 하인들을 해방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상룡 선생은 곧바로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모든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건너갔다. 망명길에 오른 이상룡 선생은 압록강을 건널 당시 “이미 내 논밭과 집 빼앗아가고, 다시 내 아내와 자식 해치려 하네.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라며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한편의 시로 남기기도 했다.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여기에서 3천500명이 넘는 독립군과 참모를 키워냈다. 이상룡 선생이 키운 독립군들은 훗날 김좌진이 이끈 청산리 대첩 등 거의 모든 독립전투를 이끌기도 했다. 또, 만주의 첫 독립운동기지였던 자치기구 ‘경학사’를 설립해 수십만 동포의 경제적 안정과 법적 지위 획득을 돕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개화 분위기에 맞춰 계몽교육운동도 진행했다. 김대락과 류인식 등 뜻을 함께한 동지들과 협동학교를 세우고 신식교육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만주에 완전히 망명한 뒤에는 만주가 우리 조상의 근원지였다는 ‘대동역사’를 저술해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쓰기도 했다. 또 만주 동포와 2세들의 계몽과 교육에 앞장서 그들이 고국땅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다.

명민준기자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