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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제주 다랑쉬오름과 조천리 포구

2015-03-06

일출봉·우도까지 거침없는 시선 다랑쉬에 빠지다
오름의 여왕…정상엔 백록담 크기 분화구
그리움의 땅 조천 연북정서 보는 일몰 장관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제주 다랑쉬오름과 조천리 포구
제주의 관문이었던 조천읍 조천리 포구에서 본 일몰대의 한라산.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제주 다랑쉬오름과 조천리 포구
조천 방파제. 한라산과 일몰의 장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제주 다랑쉬오름과 조천리 포구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제주 다랑쉬오름과 조천리 포구
조천진성의 연북정. 제주로 유배된 사람들이나 파견 관리들이 북쪽의 한양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던 정자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제주 다랑쉬오름과 조천리 포구
다랑쉬 오름은 성산방향 1132번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세화리 혹은 종달리쪽에서 들어가도 되고, 1136번 중산간 도로를 타고 송당리쪽으로 들어가도 된다. 소형차가 주차할 수 있는 작은 공터 옆에 다랑쉬 오름을 오르는 길 입구가 있다. 조천 포구는 성산방향 1132번 도로로 가다 조천읍 사무소 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태곳적 제주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 할망이 살고 있었다. 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날라 한라산을 만들었고, 치맛자락에서 흘러내린 흙더미들은 수백 개의 오름이 되었다. 할망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오름을 보며, 여느 것보다 높게 쌓인 흙더미는 손으로 한번 콱 눌렀다고 한다. 할망의 주먹만 한 분화구를 가진 오름은 많다. 그중 유난한 주먹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 오름이다.

◆ 제주 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

다랑쉬 오름의 높이는 382m, 도도하게 균형 잡힌 이 오름은 숨이 턱에 차도록 가파른 경사를 지녔다. 그래서 오르는 내내 내 몸은 다랑쉬의 피부와 빠짝 가까워 그의 흙빛 살내가 짙다. 달은 이 오름을 시나브로 타고 오르기도 하고, 모르는 사이 불쑥 그 위에 솟아 있기도 한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지어진 이름이 제주 말로 ‘다랑쉬’다.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로 ‘달수리’라고도 불리고, 한자식으로는 ‘월랑봉(月郞峰)’이라고도 하는 다랑쉬는 오름 중의 오름이요, 오름의 여왕으로도 불린다.

다랑쉬 오름은 한라산의 동북쪽 자락, 구좌읍의 송당리와 세화리에 걸쳐 있다. 정상에 서면 동남쪽으로 아끈다랑쉬 오름이 보인다. 생김과 둥근 분화구가 다랑쉬를 닮았다. ‘아끈’은 제주말로 ‘작은’ ‘둘째’라는 뜻. 그러니까 아끈다랑쉬는 작은 새끼 다랑쉬인 셈이다. 그래서 다랑쉬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다랑쉬를 아끈다랑쉬를 통해 볼 수 있다. 그 너머로 성산일출봉을 지나 우도까지 시선은 거침없이 뻗어 나간다.

분화구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다. 둘레는 1.5㎞, 깊이는 115m로 한라산 백록담의 깊이와 비슷하다. 설문대 할망의 억센 주먹이 만들어놓은 분화구는 무서울 정도로 패여 있고, 무성한 풀로 덮여 있고, 한 그루 애동초목이 봄날의 꽃반지마냥 싱싱하고 애달게 자라 있다. 달의 거처 같기도 하고, 바람의 웅덩이 같기도 하다. 둘레를 걷는 동안 용눈이 오름, 높은 오름, 돛 오름, 둔지 오름 등 멋진 오름을 멀리 지나친다. 많은 오름 사이는 죄다 밭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저 밭들은 풍요로운 할망의 살, 옛날에는 그것에 기대 살던 사람이 있었다.

◆ 사라진 다랑쉬 마을

다랑쉬 오름 아래에는 다랑쉬 마을이 있었다. 20여 가구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다. 1948년 차가운 봄날에 제주 땅을 피로 물들였던 4·3사건이 터졌다. 다랑쉬 마을 사람들은 오름 앞 들판에 있던 다랑쉬 굴로 숨어들어 갔다. 군경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질렀다. 사람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죽어갔다. 몰살, 이었다.

1992년, 44년 만에 그들의 주검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 굴속의 바닥에는 시신 11구가 누워 있었다고 한다. 아홉살 어린아이부터 51세의 아주머니까지, 모두 민간인이었다. 그 옆으로는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무쇠솥, 항아리 등 생활용품이 널려 있었다. 시신은 발굴 직후 급히 화장되어 푸른 제주 바다에 뿌려졌다. 현재 다랑쉬 굴의 입구는 굳게 폐쇄되어 있다. 마을은 폐촌이 되었고 돌담과 집터와 우물터만 남은 마을의 입구를 늙은 팽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다.

설문대 할망은 때때로 한라산을 깔고 앉아 성산을 빨래 바구니로, 우도를 빨래판 삼아 빨래를 했다 한다. 그때 다랑쉬 오름과 다랑쉬 마을과 푸른 밭들은 할망의 치마폭에 덮여 안온했을 것이다. 할망도 어찌할 수 없었던 비극의 시간이 지나 갈대밭 무성한 마을 앞들은 오늘 푸르고 안온하다.

◆ 제주의 관문, 조천

제주의 북쪽 갯마을 조천. 육지로는 한라산의 북동쪽 면과 그 주변에 오망오망 솟아난 오름이 보이고, 북으로는 다만 바다가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옛날 조천은 애월과 함께 제주의 관문이었다. 육지로 향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바람 잦기를 기다렸고, 전라도를 경유해 제주로 항해해 온 이들은 이곳에 배를 대었다. 조천의 바다는 육지와 섬을 가장 가까이 이어주는 바다, ‘조선의 하늘(朝天)’이라는 이름도 이곳이 뭍과 이어져 있다는 간절한 당위에서 온 게 아닐까.

조천의 포구 바로 옆에는 조천진성(朝天鎭城)이 있다. 조천진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 군사시설로 조천, 왜포, 함덕 해안 일대를 관할했다 한다. 축성연대는 미상이지만 선조 23년인 1590년에 중창된 기록이 있다. 타원형의 성곽 안, 꽤 높은 축대 위에는 연북정(戀北亭)이 자리 한다. 고려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본래 객사였다 한다. 당시에는 성의 바깥에 있었고 성 안으로 옮겨진 것은 선조 때다. 연북, 북쪽을 그리워하는 정자다. 제주로 유배된 이들이나 파견 관리들은 이곳에서 고향과 임금이 있는 북녘의 한양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연북정에서 일몰을 기다린다. 옛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리움보다는 어쩐지 애틋함이 든다. 구름이 점점 걷히면서 한라산이 하얀 산마루를 드러낸다. 설문대 할망은 제주 사람들에게 속옷 한 벌을 지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했다. 속옷은 완성되지 못했고, 사람들은 안타까워 속이 상했고, 제주는 여전히 망망대해의 섬이다. 한라산을 베고 돌아누운 할망의 정수리 같은 산마루가 점점 붉고, 검게 변해간다. 사람들은 조천의 방파제로 몰려간다. 놓이지 못한 다리처럼 바다로 뻗어있는 방파제에서 일몰을 보내고 날카로운 달을 맞는다.

여행정보
다랑쉬 오름은 성산방향 1132번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세화리 혹은 종달리쪽에서 들어가도 되고, 1136번 중산간 도로를 타고 송당리쪽으로 들어가도 된다. 소형차가 주차할 수 있는 작은 공터 옆에 다랑쉬 오름을 오르는 길 입구가 있다. 조천 포구는 성산방향 1132번 도로로 가다 조천읍 사무소 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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