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0328.010050742080001

영남일보TV

[아름다운 동행] 경북 5호 아너소사이어티 이부형씨

2015-03-28

“경북에 부자 많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적어 충격 받았다”
(2012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 기탁하며)

20150328
낮에는 기름배달을, 밤에는 군고구마 장사를 하던 이부형씨는 수십년 뒤 기업가이자 대학교수로 성장해 지역 청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이씨는 ‘좋은 세상은 같이 잘사는 세상’이라는 철학으로 어려운 이웃의 삶을 받쳐주는 든든한 통나무가 되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천막서 석유배달로 사업 시작
이후 군고구마·판촉물·떡 등
다양한 분야서 적잖게 돈벌어

한때 中서 대실패 경험했지만
‘삐삐’로 재기해 큰 富 일군 뒤
지역 기부문화에 새롭게 눈 떠

초등땐 교문앞 친구돕기 모금
매년 이웃에 생필품 전달하기도
“모두가 잘 살아야 나도 행복”


1984년 초겨울쯤, 포항의 한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한동안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몇몇이 어려운 친구들을 돕겠다며 스스로 모금함과 팻말을 준비해 모금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 그 중심엔 6학년짜리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당시로선 꽤 거금인 80만원을 모아, 굶주리던 친구들에게 일일이 돈을 나눠줬다. 그 소년의 첫 기부였다.

시작부터 남달랐던 소년은, 성인으로 성장하며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한 그는, 이후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하며 포항에서 알아주는 사업가로 성장했다. 이제는,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청년들에게 알려주는 대학교수로서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른이 된 소년은 성공가도를 달려오는 동안에도 수십년 전의 ‘교문 앞 모금운동’을 잊지 않았다. 매년 조금씩이라도 이웃을 돕던 그는 2012년 지역사회에 1억원을 기부하며 지역민의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5호 아너소사이어티회원(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이부형씨(44)의 이야기다. 지난 25일 포항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빌딩 안으로 기자를 초대해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털어놨다.

1972년 포항의 한 공무원 집안에서 3남2녀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공무원인 아버지로부터 ‘혼자 잘 살면 소용없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앞서 소개한 ‘교문 앞 모금운동’ 일화도 아버지의 지속적인 가르침에서 비롯된 셈이다.

장난끼가 많고 리더십도 뛰어났던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신의 미래에 도전장을 던졌다. 당시까지만해도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면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는 분위기였지만, 이씨의 머릿속은 ‘돈을 엄청 벌어 남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씨는 아버지에게 찾아가 “대학 등록금을 주는 대신, 사업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대학에 가지 않는 것은 허락하지만, 돈은 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이씨는 맨몸으로 세상과의 첫 승부를 시작했다.

당당히 첫 걸음을 내디뎠지만, 혈혈단신으로 돈벌이를 할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고민끝에 이씨는 낮에는 석유배달, 밤에는 군고구마 장사를 하기로 했다.

군고구마 장사는 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펼치면 됐지만, 석유배달은 사무실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씨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고, 고민 끝에 근처 한 야산에 천막을 치고 나름의 공간을 만들었다. 거기에다 주문을 받기 위한 전화기 1대를 설치하는 것으로, 이씨 생애 첫 사무실이 탄생했다.

이씨가 첫 사업으로 시작한 석유배달은 틈새시장을 제대로 공략한 덕분에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안 다방과 식당 등에 겨울철 석유 난로용 연료를 배달했다. 추운 날씨로 인해 이씨 이외에는 이 일에 나서는 이가 없었고, 자연히 몸을 움직이는 것 만으로 돈은 쓸어다 담을 수 있었다.

석유배달이 필요없는 여름에는 차량정체가 빚어지는 곳을 집중적으로 찾아가 시원한 음료수를 팔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이씨는 ‘광고 기획’이라는 두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기념품용 라이터 판촉물이나 현수막 등을 제작하는 사업이었다. 두번째 사업에서도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어느날 중국 진출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그간 벌어두었던 돈을 몽땅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가장 힘든 일을 찾았다. 바로 떡집 사업이었다.

그렇게 포항 죽도시장에 떡집을 차렸지만, 막상 그는 반죽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떡 기술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 떡 만드는 일에 도전을 했다. 옆집 떡가게에도 찾아가 곁눈질로 떡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떡 맛이 괜찮아져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하던 어느 날, 이씨의 눈에 특별한 모습이 들어왔다. 죽도시장 한켠에 자리잡은 잡화도매상에서 중증장애인과 노인들이 봉투와 고무줄 등을 떼어다가 판매하러 나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떡집에 안주하려던 자신을 돌아보니 한없이 부끄러웠다는 이씨. 떡집을 박차고 나와 생애 세 번째 사업에 도전한다. 당시 국내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삐삐 장사’였다. 하지만 삐삐 대리점 사업권을 차지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이권이 큰 사업인 만큼 본사에서 생전 처음 보는 그에게 사업권을 내줄 리 만무했다.

이씨는 포기하지 않고 본사를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갔고, 마침내 사업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말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장사’였던 삐삐장사는 이씨에게 큰 돈을 안겨다 줬고, 이후 전국 수십여곳의 매장을 차리게 됐다. 2005년에는 포항시 남구의 한 백화점 건물을 인수해 부동산 개발사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의류판매와 식당 등으로 사업분야를 확장했다.

나름의 여유가 생긴 이씨는 미뤄뒀던 학업에 도전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이씨는 그간의 경영활동을 인정받아 대학측으로부터 식품경영학분야 교수 제의를 받는 데 이른다. 야산 천막 사무실 사장님에서 시작해 20여년만에 기업가를 넘어,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성공가도를 달려오는 동안, 이씨는 한 번도 어려운 이웃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매년 라면과 생활용품을 준비해 주변 이웃을 도왔다. 그런 그가 돌연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 기탁을 제의한 것은 2012년. 이씨는 “경북에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이들이 너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젊은 내가 기부한다면, 나를 따라서 아너소사이어티가 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씨의 뜻이 경북 곳곳에 전달됐을까. 당시까지만 해도 4명에 불과하던 도내 아너소사이어티는 2년여가 지난 현재 34명으로 증가했다. 인터뷰를 마무리지으며 이씨는 “모두가 다같이 잘 살아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같다. 많은 이가 기부와 봉사에 동참해 다같이 잘 사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명민준기자 minjun@yeongnam.com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