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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부산 금정산 금정산성

2015-05-15

뱀처럼 산의 능선 감고 앉은 성엔 긴장된 평화가 흐른다

20150515
금정산성의 동문. 사대문 중 정문 격으로 양쪽 성벽위로 총안이 뚫린 여장(성벽 위에 덧쌓은 낮은 담)이 복원되어 있다. 성벽의 높이는 여장을 포함해 3m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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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쪽 여장이 없는 부분. 여장은 문과 망루 등 특수한 곳에만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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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의 여장. 고증을 통해 복원된 남문 여장의 형태에 따라 최근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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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마을의 양조장. 향토주로 지정되어 있는 금정산성 막걸리가 이곳에서 빚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산성
동래·낙동강이 훤히 보이는
최고의 입지
전쟁했었다는 기록은 없어
사대문은 현대에 모두 복원
금정산 가운데 분지에 마을
이곳에서 생산되는 막걸리
1980년 향토주로 지정됐다

산성의 목적은 방어였다. 그것은 호전적이지 않다. 공격을 하지 않으면 물지 않는 뱀처럼, 산성은 산의 능선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그 피부에 긴장된 태평이 흐른다. 현재 중부 이남에만 1천200개 이상의 산성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저 숫자가 이 땅의 역사를 말해준다. 쌓아 올린 성은 침략과 약탈의 역사를 살아내기 위한 기술이었다.

◆ 금정산성 혹은 동래산성

역사상 끊임없었던 왜구의 침략, 최전방은 부산이었다. 금정산성, 동래읍성, 기장읍성, 좌수영성, 부산진지성, 다대진영성, 동평현성, 배산성, 천성진성 등 이처럼 많은 성이 부산에 들어앉아 있는 이유다. ‘택리지’는 ‘왜국에서 우리나라에 상륙하는 첫 지점이 부산의 동래’라고 전한다. 신숙주는 동래에 대해 ‘땅이 바다에 닿아 있으며, 대마도와 가장 가까워서 연기와 불빛까지 서로 보이는 거리이니, 실로 왜인이 오가는 요충지다’라고 했다.

동래의 북서쪽에 태백산맥의 남쪽 끝자락인 금정산이 솟아 있다. 해발 800m가 조금 넘는 그리 크지 않은 이 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 있다. 금정산성이다. 숙종 29년인 1703년, 경상감사 조태동이 동래의 방비를 위해 건의하고 동래부사 박태환이 쌓은 것으로 본래 이름은 동래산성이었다 한다. 그러나 현종 때인 1667년에 통제사 이지형이 산성의 보수를 건의한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최초는 삼국시대로 추정한다.

현재 금정산성에는 사대문이 모두 복원되어 있다. 금정산의 정상인 고당봉을 정점으로 북쪽의 원효봉, 남쪽의 동제봉, 서남쪽의 상계봉과 파리봉 등을 잇는 성곽의 길이는 17㎞가 넘는다. 문과 문 사이에는 망루가 있고 곳곳에서 낙동강 하류의 장한 물길과 동래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훌륭한 입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싸움이 치러졌다는 기록은 없다.

◆ 금정산성 동문에서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15m 지점에 금정산성의 동문이 위치한다. 3m가 넘는 홍예문인 동문은 사대문 중 가장 크고 동래읍성과 가까워 정문의 역할을 했던 문이다. 순조 6년인 1806년에 동문을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의 모습은 1972년부터 91년 사이에 복원한 것이다. 주변 성벽에 사용된 돌은 크기도 모양도 다양하다. 돌들은 금정산의 자연 암반에서 떼어낸 화강암이라 한다.

동문의 양쪽에는 성벽 위에 덧쌓은 낮은 담인 여장이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정사각형의 총안도 뚫려 있다. 동문의 여장은 93년에 전문가의 고증 없이 수원 화성을 본떠 복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문화재위원회의 고증을 받아 남문의 여장을 복원하면서 동문의 여장이 구설에 오르게 된다. 이후 남문의 것과 같이 고쳐 지은 것이 현재 동문 여장의 모습이다. 성벽의 높이는 1.5m에서 3m 정도로 구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제법 높다. 그래선지 성벽의 가장자리 쪽은 여장이 있는 곳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동문의 성 안쪽에는 솔숲이 울창하다.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군데군데 놓인 벤치에 몇몇 사람이 하오의 숲 그늘에 젖어 있다. 동네 뒷산의 공원 분위기도 살짝 느껴진다. 성 안에는 관아 건물과 장대, 교련청, 군기고, 화약고 등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나무의 간격이 유난히 넓다 싶은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려 하지만 부질없다.

◆ 산성마을, 산성 막걸리

동문에서 해발 15m 아래, 금정산 한가운데 분지에 마을이 있다. 법정동리명은 금성동, 흔히 산성마을이라 부른다. 이 마을에서 우리나라 막걸리 중 유일하게 향토 민속주로 지정되어 있는 금정산성 막걸리를 빚는다. 산성을 축조할 적에 동원된 인부는 5만명. 그들이 낮참으로 마셨던 술이 바로 금정산성 막걸리였다 한다.

시작은 조선 초기 화전민이 생계를 위해 누룩을 빚으면서다. 이후 오씨, 장씨, 김씨가 정착하면서 막걸리를 담그기 시작했다고 한다. 약간의 신맛과 단맛이 감칠맛을 내는 막걸리는 점점 그 이름이 널리 퍼졌고, 부역했던 이들은 고향에 돌아가서도 그 맛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 막걸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수사령관 시절 즐겨 마셨고 이후 청와대에도 공급되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누룩의 제조가 금지되면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산성막걸리는 80년 국세청에 의해 향토주로 지정되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정보

대구부산 고속도로 김해부산IC를 통과한 후 김해 방향으로 간다. 대저 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 만덕 방향으로 가다 덕천IC로 나간다. 35번 국도 양산방향으로 가다 화명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계속 가면 금정산성 산성마을이다. 마을에서 동문까지는 약 800m로 승용차로 근처까지 갈 수 있다. 북문과 서문, 정상 등으로 가는 다양한 길이 있다. 동문은 가장 접근이 쉬운 곳이다. 산성막걸리는 산성마을 식당의 어느 곳에서나 맛볼 수 있고 양조장에서 구입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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