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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스토리의 寶庫 청송 .2] 전통의 명문가 청송심씨와 덕천리 심부잣집 송소고택

2015-06-29

하늘이 내린 ‘화수분 재산’ 민초와 나라 위해 아낌없이 쓰다

20150629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의 만석꾼이던 심처대의 7세손인 송소 심호택이 지은 집으로 심부잣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청송심씨는 9대에 걸쳐 만석꾼 소리를 들으며,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영남의 대부호로 명성이 높았다.



◇효심 지극했던 심처대
이성계 역성혁명 반대 ‘향파’ 심원부의 후손
노승이 점지한 곳 아내 묫자리 써 ‘9代 부자’

◇99칸 지은 송소 심호택
전답 처분해 세금 내고 국채보상운동도 앞장
아들 둘은 농지개혁때 소작농에 토지 나눠줘


#1.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처대(沈處大)

나뭇가지에 매달려 할랑거리는 햇살을, 작고 미지근한 바람 한 점이 부수고 지나갔다. 그늘이 흔들렸다. 하지만 고갯마루는 금세 심심해졌고, 날짐승의 옅은 기척 하나 없는 적막으로 가라앉았다. 그 가운데를 따뜻한 안색의 사내가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때는 조선 영조조였고, 사내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처대(沈處大)였다.

청송심씨는 전통의 명문가다. 시조는 심홍부(沈洪孚)로, 고려 충렬왕 때의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이다.

청송심씨는 시조 심홍부의 증손인 심덕부(沈德符)와 심원부(沈元符) 형제부터 계보가 크게 둘로 나뉘어졌다. 형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공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어 가문의 영달을 연 인물이다.

반면에 심원부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이때부터 청송심씨는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나뉘게 되었다. 심덕부의 후손을 가리켜 경파(京派), 청송을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 퍼져 사는 심원부의 자손을 일컬어 향파(鄕派)라 부른다.



#2. 하늘이 점지한 부자

심처대는 고려에 충절을 지킨 심원부의 후손이었다. 하여 그 또한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선대가 살던 청송 덕천마을에서 호박골(청송군 파천면 지경리)로 분가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없는 살림에 식솔은 다섯이나 되었다. 심약한 아내는 시름시름 앓다 결국 병석에 들고 말았다.

궁핍하고 힘든 살림이었지만 의와 정은 도타웠다. 무엇보다 효심이 지극했다. 심처대는 분가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모를 찾아뵙는 효자였다. 걸어서 20리 길이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덕천마을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때였다. 멀찍이 눈밭에 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가 쓰러져있었다. 아마도 길 잃고 배곯다 기력이 다해버린 산짐승일 거라는 생각에 심처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그의 눈에 짚인 것은 놀랍게도 사람, 게다가 노스님이었다.

‘이 엄동설한에 변이라도 생기면 큰일 아닌가. 어서 집으로 모셔가야겠다.’

심처대는 스님을 집으로 옮겨 정성껏 간병했다. 고된 농사일에 병들어 누워있는 아내 수발까지 녹록지 않은 일이었지만 심처대는 마음과 몸에 지극한 힘을 다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시간이 이레쯤 지나서였을까. 다행히 스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한층 더 형형해진 눈빛으로 심처대를 근처의 산언덕으로 이끌었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자리였다.

“이곳에 묘를 쓰시오. 하고, 지금 가진 심성을 잘 지켜 살아가면 대대로 발복할 게요.”

그러고는 더 이상의 말을 얹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 심처대는 고마웠지만 묫자리는 먼 훗날에나 닥칠 일이라 여기고 담담히 일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오래고 깊은 병에 시들 대로 시들더니 결국 목숨을 내려놓은 것이다. 심처대는 상심과 애심으로 부쩍 여윈 몸을 견디며 스님이 일러준 자리에 아내의 묘를 썼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성실히 일을 하며 집안을 지켰다. 이후 심처대의 집안은 만사가 형통함은 물론이거니와 재산 또한 착실하게 불어났다. 어찌나 거칠 것이 없었는지 만석에까지 이르렀고, 1960년대까지 무려 9대에 걸쳐 만석꾼을 배출했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3. 마음과 정신이 닿은 집…99칸 송소고택

세월이 7세손 송소 심호택(松韶 沈琥澤)의 대에 머물 때였다. 심호택의 고민이 날로 깊어졌다.

‘여기 호박골이 너무 외진 데다 재물을 탐내고 달려드는 이가 날로 늘어나니 아무래도 더 이상은 아니 되겠다.”

하여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살림터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심호택은 호박골과 덕천마을을 부지런히 오가며 땅을 물색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대목장이 내려왔고, 당시 궁궐 건축에나 쓰던 적송(赤松)이 바리바리 실려왔다. 당연히 거금이 오갔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도둑들이 심호택이 없는 날을 골라 그의 집으로 들이닥쳐서는 세간을 부수고 사람을 때리며 횡포와 난동을 부렸다. 그때 심호택의 노모(老母)가 나섰다.

“재물만 가져가면 그만일 것을, 어찌 멀쩡한 집을 부수고 애먼 사람을 해치는가?” 백발이 성성한 노모의 기개에 도둑들은 당황했다. 하여 우물쭈물 멈칫멈칫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노모가 성큼성큼 도둑들에게 다가섰다. “내 곳간으로 안내할 터이니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게.” 그런데 그렇게나 털고, 그렇게나 쓸어갔는데도 심호택의 재산은 끄떡없었다.

덕촌마을의 집은 1890년 지어졌다. 게다가 99칸이었다. 이는 양반이 누릴 수 있는 최대 크기였다. 적송의 붉은 기운이 감도는 이 집은 송소 심호택이 지었다 하여 송소고택(松韶古宅)이라 불리게 되었다.

덕촌마을 이주 후에도 심호택의 부(富)는 건재했다. 그만큼 나라에 세금도 많이 냈다. 갑오개혁(1894) 즈음 나라에서 세금을 은화로 내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였다. 심호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안계고을(의성군 안계면)에 있던 전답을 모두 처분해 은화로 바꾸었는데, 고을의 은화란 은화가 죄다 심호택에게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양과 부피와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하여 그 은화를 청송으로 실어오는 행렬이 무려 10리(약 4㎞)에 이르렀다.

#4. 나눔과 베풂의 삶…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

심호택의 날숨이 길었다. 시국이 말이 아니었다. 일제의 차관공세는 갈수록 노골적이었고, 1907년에 이르러 나라 빚이 1천300만원에 달했다. 그해 2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신호탄이 올랐다. ‘담배를 끊어 국권을 회복하자’는 외침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심호택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채보상회장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나라를 살리는 데 힘을 실어야 했다. 심호택은 고을의 각 집으로 보낼 국채보상회 취지서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국용(國用)이 모자라서 외국의 부채차관이 벌써 1천300만원(圓)이나 되는데 이것은 온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일대 관건이다. 우리 고을은 비록 변방에 있지만 티끌만 한 보답이라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의연금의 다과를 막론하고 서로 권고해 동참하자.’

심호택은 또 한번의 깊은 호흡으로 정신을 환기했다. 그는 이제 그 어떤 고초도 겪어낼 것이었다.

(2009년 7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새롭게 공개한 25종의 자료에 따르면, 심호택은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청송 일대에 배포된 당시 국채보상회 취지서에는 ‘국채보상회장 심호택’이 주민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피는 못 속인다 했던가. 광복 이후에 농지개혁이 일어났을 때였다. 심호택의 아들 심상원과 그의 아들 심운섭은 가히 선구적이라 할 수 있는 중대한 결정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지역의 소작농에게 분배함으로써 지역에서 최초로 자작농이 창설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로써 심부자는 9대째에서 ‘부자’를 내려놓았다. 실로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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