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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 자신의 일·직장에 애착 가졌으면…”

2015-07-01

대구서 구두수선방 운영 유수봉씨
희귀질환으로 다리절단 아픔 딛고
장애인단체 만들어 봉사활동 펼쳐

“요즘 젊은이들 자신의 일·직장에 애착 가졌으면…”
유수봉씨가 대구시 북구 구암동 운암역 앞 자신의 구두 수선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구시 북구 구암동 운암역 앞 3.3㎡ 남짓한 임시 건물. 의자 왼쪽에는 목발 두 개가 오랜 친구처럼 그를 지키고 있고, 낮은 천장에서는 작은 선풍기가 돌아간다. 유수봉씨(62)가 맨손으로 구두와 가방을 수선하느라 분주하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유씨는 20대 초반에 국가 기능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3년여 공무원 생활을 하던 중 희귀성 질환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병가를 내고 몇 차례 걸쳐 수술을 했다. 그때마다 수백만원씩 들어가는 병원비며 생활비는 아픈 몸만큼 고통스러웠다. 2년 정도는 그나마 병가 중 지급된 월급으로 근근이 버텼지만, 무릎까지 절단한 몸으로 복직이 어려워지자 사표를 냈다.

병원생활 5년.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처음에 무릎까지만 절단하고 의족을 했던 그는 의족을 버리고 허벅지까지 절단해야 했다. 알거지로 고향에 돌아온 유씨는 술에 의존해서 지냈다. 술은 지우개였다. 아픔을 지워줬지만 동시에 그의 미래마저 지워버렸다. 아내가 날품팔이로 벌어온 돈으로 가족들은 겨우 입에 풀칠했다.

자신의 고통만 한탄해오던 어느날 핏덩이 같은 아이들과 하루하루 날품팔이하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유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장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때서야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었다. 목발을 짚고 일터를 찾아 나섰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버티기엔 세상이 녹록지 않았다.

유씨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대구로 이사했다. 형의 권유로 대구대 내 작은 공방에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출퇴근 시간을 목숨처럼 지켰다. 그런 유씨를 눈여겨 본 업체로부터 일자리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구점, 석재상, 자동차 부품공장 등 손으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했다. 손재주가 타고난 유씨는 보기만 하면 무엇이든 해냈다.

어느 정도 자리잡은 유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에게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마음추진운동 장애인단체를 결성해 봉사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 유씨는 “내 몸의 일부가 없는 것은 장애도 아니었다. 봉사를 다녀보니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유씨는 장애인을 위한 자립장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후 50대에 들어서면서 유씨는 정착하고 싶어졌다. 그때 만난 게 구두 수선방이다. 처음엔 무허가 건물이란 이유로 쫓겨 다녀야 했다. 5년간 그는 구청이며 시청으로 문턱이 닳도록 다녔다. 지금의 구두 수선방은 대구시 도시계획과의 공모전에 응모한 작품으로, 이제는 구청 승인 하에 당당하게 세금을 내고 있다.

그는 그동안 도움 준 사람들이 고맙지만, 일을 포기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도 고마워했다. 초등학교가 학벌의 전부이고 다리 하나가 없는 장애인인 유씨가 요즘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세상의 어떤 직장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일과 직장을 좋아해야 한다.”

글·사진=조경희 시민기자 iliklak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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