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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27] 안동 학봉 종가 ‘불천위 제사상’

2015-07-02

학봉선생 애민정신·독야청청 기리는 ‘특별한 제수’ 상에 올려

20150702
학봉 김성일의 불천위 제사상. 김성일의 정신과 삶을 기리기 위해 산마와 송기송편 등을 항상 올린다. 왼쪽 밤 뒤편 약과 위에 얹은 것이 산마이고, 송기송편은 오른쪽 떡 접시 위에 다른 떡과 함께 올라있다.
20150702
안동의 학봉종택. 해마다 학봉 김성일의 제삿날이 되면 각지에서 50~60명의 제관이 찾아와 제사에 참석한다.

안동의 대표적 종가인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 종가는 해마다 6월이면 불천위(不遷位) 김성일 신위를 기리는 제사를 성대하게 지낸다. 김성일의 기일은 음력 4월29일이다.

후손들이 정성을 다해 차리는 이 불천위 제사상에 김성일 별세 후 제사가 시작된 이래, 변함 없이 오르는 특별한 제사 음식이 있다. 산마이다. 약과 위에 얹어 올리는데, 익혀서 쓴다. 물론 지금도 불천위 제사상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사용한 송기 송편과 소금장도 제수로 오른다. 이런 제사 음식은 학봉 김성일이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의 전쟁터 곳곳에서 민생을 돌보며 전쟁을 총괄해 진두지휘하는 절도사와 관찰사, 초유사 등의 직분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수행하면서 겪어야 했던 고초와 관련이 있다.

김성일은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직 혼신의 힘을 다해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면서 전염병이 도는 전쟁터에서 장수와 병사들을 독려하다 결국 진주의 관사에서 병으로 별세하게 된다. 후손들은 당시 상황에서 보여준 김성일의 고귀한 정신과 평소의 가르침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제사상에 이런 제수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 전쟁 중 병 치료와 굶주림 면하기 위해 병사와 함께 먹었던 ‘산마’

김성일은 1592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왜군의 침략 상황이 급박해지자 임금은 일본 사신 때의 보고를 허물 삼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여러 대신과 왕세자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꿔 다시 초유사(招諭使)로 임명했다. 초유사는 난리가 일어났을 때 혼란에 빠진 백성을 도우며 안정시키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이다.

김성일은 초유사로 경상도 지역에서 민생을 돌보면서 의병을 모으고 독려하는 초유 활동에 매진했다. 뛰어난 초유문을 통해 의병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난중 구휼음식 산마
임진왜란때 경상관찰사 활약 김성일
질병·굶주림 겪는 병사와 나눠 먹어
끝내 역질에 감염돼 진주공관서 별세

◇ 절개 상징 송기송편
임금·신하 잘못 있으면 ‘서릿발 비판’
정의롭고 올곧은 기개 소나무와 닮아
후손들, 나무 속껍질 이용 송편 빚어


8월에는 왜적들이 웅거하고 있는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됐다. 임금은 ‘경은 본도 사람이며 또 특별한 공적을 세웠으니, 지금 더러운 왜놈들을 섬멸해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경을 버려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라며 중책을 맡겼다.

9월에는 다시 우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1593년 4월 다시 진주에 머물게 된다. 가는 곳마다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고, 봉두난발을 한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빌기도 했다. 이에 김성일은 진주목사에게 진휼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고, 판관에게는 군기(軍器)를 전담해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몸소 죽을 쑤고 약을 달이면서 백성들을 구휼했다. 그리고 성을 돌아보고 군사를 검열하면서 반드시 직접 점검했다.

이때 역질(疫疾)이 곳곳에 만연하였으며,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성 안으로 몰려들어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에 김성일을 가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으며,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놓곤 했다. 주위 사람들이 “식사를 하지 않아 병이 나면 국사는 어찌합니까" 하자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누군가 역질을 피할 것을 청하자 “다른 사람을 대신 시켜서 일을 하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나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나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그러니 어찌 피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러다 4월19일에는 몸이 상한 데다 감기가 들었고, 역질까지 전염돼 위독해졌다. 약을 먹을 것을 청하자 “내 병은 약을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만두어라”고 말하고는 “중국 군사가 들어오면 어떻게 먹일 것인가. 그대들은 그 일에 대해 힘쓰라”며 혼미한 속에서도 나라 걱정만 했다. 그리고 왜적들이 물러나고 있음을 알리자 “왜적이 도망쳐 물러가면 나라야 회복하겠지만, 조정의 붕당은 누가 능히 깨뜨릴 것인가”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결국 29일 진주 공관(公館)에서 별세했다. 백성들은 “하늘이 우리 부모를 빼앗아 갔으니, 우리 목숨도 다했다”며 애통해 했다.

후손들은 당시 김성일이 병사들의 역병을 치료하고 굶주림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 산마를 먹게 하고 자신도 먹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성일은 별세 후 입관을 마치고 지리산에 임시로 묻혔다가, 몇 개월 후인 11월에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 선영에 다시 묻혔다. 그리고 별세 당시 더운 초여름이라서 초혼(招魂)할 때 부패 방지를 위해 소금을 사용했다. 그래서 제사상에 소금장을 꼭 올리고 있다고 한다.

◆ 독야청청한 김성일의 기개를 기리는 ‘송기 송편’

김성일은 정의롭고 올곧은 기개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독야청청한 소나무와 같은 절개를 지니고 있었다.

김성일은 상대가 누구든 잘못이 있으면 서릿발 같은 비판을 했다.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여도 거리낌 없이 비판할 것은 비판했다. 물론 불의와 부정이 있는 조정 관리도 사정없이 탄핵해 바로잡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대궐 안 호랑이(殿上虎)’라 불렀다.

그에게는 오직 옳고 그름만이 언행의 잣대였다. 그의 이런 언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1579년 9월 그가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가 되어 온다는 소식이 있자, 일부 수령들은 인수(印綬)를 끌러 놓고 달아나는 일도 있었다.

이런 그의 기개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를 이용한 송기 송편을 빚어 제사에 올리고 있다.

소나무와 관련해서는 김성일이 초유사와 관찰사로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백성과 병사들을 구휼할 당시, 솔잎이나 송기를 사용해 백성을 구휼했음을 알려주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도내 유랑민이 공의 행차가 지나가면 길을 막고, 머무르면 뜰에 가득 찼는데, 공은 반드시 소금과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거창, 함양, 산음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다. 그리고 수시로 그 음식물을 가져다가 직접 살피고 맛보았다. 또 솔잎가루를 많이 만들어 죽에 섞어서 먹이도록 했다.’

이런 김성일을 백성들은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그가 머물다 떠나게 되면 부모를 잃은 것처럼 울부짖기도 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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