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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KTX시대 포항, 주말&여기 어때? .14] 연오랑 세오녀의 고장 포항

2015-10-06

고대설화 품은 일월지…은유·상징·금기로 일렁인다

20151006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전해오는 일월지. 해병대 사령부 내에 위치하며 동서 약 250m, 남북 약 150m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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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면의 입구이자 비행장 초입에 고장의 상징으로 서있는 연오랑과 세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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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사당. 동해면사무소 뒤 언덕에 위치하며 매년 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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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하늘과 땅이 일치하는 곳. 파도가 치고 수면이 일렁이는 곳에서 이야기는 태어난다. 운명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듯, 태양과 달이 떠오르듯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바다에는 파도가 있었다. 바람이 보이지 않아도 그 호수는 일렁였다. 이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보이지 않지만 태어나고 전해지고 퍼져나간다. 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연오랑 세오녀는 신라의 철기 장인
무기재료인 사철 구하러 日 건너가

부부가 살던 일월지 건드리면 흉사
신라때부터 중양절마다 제사 지내

형산강은 질좋은 사철 많이 나던 곳
포항에 포스코가 자리한 것은 필연

◆ 도구 바다와 일월사당

서기 157년, 신라 8대 아달라왕 때의 이야기다. 포항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연오랑은 바닷가에서 해조를 캐다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 사람들은 그를 귀인으로 여겨 임금으로 삼았다. 남편을 찾아 나온 세오녀는 연오랑의 신발을 보고는 바위에 오른다.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간 세오녀는 왕비가 된다.

그들이 떠난 후 신라는 갑자기 해와 달이 빛을 잃고 천지가 어두워졌으니, 일월(日月)의 정기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라 했다. 다시 돌아오라는 청을 거절한 연오랑과 세오녀는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내어주며 그들이 살던 못가에 단을 쌓고 비단을 걸어 제를 지내라 한다. 얇고 긴 비단이 하늘거리는 가운데 정성으로 제를 지내니 신라 땅에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했다 한다.

설화집 수이전(殊異傳)과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야기다. 세오녀의 비단은 국보로 삼았고 보관한 창고는 귀비고라 했으며 제사를 지내던 곳은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고 덧붙여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떠난 곳이 포항 동해면의 도구 해안이라 한다. 영일만 전체가 한눈에 잡히는 남쪽 모서리에 부드럽게 펼쳐진 곡진 해변이다. 지금껏 도구 바다를 네 번 보았는데, 늘 해변은 적막했고 바다에는 제법 으르렁대는 파도가 일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는 한여름에도 그러했으니 기묘한 인연이라 여겼다. 바닷가에는 몇 그루 싸늘한 나무가 조형물처럼 서 있다.

매년 시월에 이 바닷가에서 연오랑 세오녀 축제가 열린다. 부녀자들의 원무나 다양한 민속공연이 열리고 주민 화합과 친선을 위한 행사로 구성되어 있다. 축제의 시작은 일월사당에서 제를 올리는 것이다. 일월사당은 동해면사무소 뒤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다. 신라의 왕릉에서나 봤음직한 위엄있는 소나무들이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데, 굼실굼실 하늘로 오르는 나무들은 일제히 읍(揖)하듯 사당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 해달못, 일월지

도구리의 서쪽이 일월동이다. 일월동 한가운데를 해병대 부대와 비행장이 넓게 차지하고 앉아 있다. 부대 안에 세오녀의 비단을 놓고 제를 지냈던 연못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해달못이라 했다. 이후 한자화되어 일월지(日月池)라 한다. 기록이 전하는 ‘영일현’은 ‘해가 떠오르는 곳’을 뜻하고 ‘도기야’는 ‘달의 들판’을 의미한다. 일월지 부근에는 신라시대부터 천제단(天祭壇)이 있었고, 매해 중양절(음력 9월9일)에 해와 달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일월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못이라 하여 ‘천제지’라고 하기도 했고, 해와 달의 빛이 다시 돌아왔다고 ‘광복지’라 부르기도 했다. 천제단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수면이 거울 같다. 물속에 구름이 일렁인다. 물속은 가늠되지 않는다. 수면 아래는 그대로 육화되어 대지의 어둠이 된 것만 같다. 연못의 한쪽은 반짝반짝 깨끗한 연잎으로 뒤덮여 있다. 연잎 외에는 어떤 너겁도 보이지 않는다. 흰 물새가 우아하게 동심원을 그린다. 연을 둘러싼 나무들은 결코 숲이라 할 수 없지만 그늘이 짙다. 못 둑 가에는 일월지 사적비와 연오랑 세오녀 설화비가 서있다. 사적비는 역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92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군부대와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 일월지는 보다 넓었고 주변으로는 농지와 숲이 있었다고 한다. 노송이 우거진 숲은 낮에도 도적이 출몰할 만큼 은밀한 곳이었다 한다. 지금 비행장이 들어서 있는 곳이 일월동 부락민이 살던 골짜기였다고 한다. 비행장 공사로 일월동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 일부가 일월동과 도구리의 경계에 취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못 둑 아래 농지에 연병장을 조성한 것은 1989년에서 90년이다. 4~5년쯤 지난 어느 해, 날이 가물어 일월지의 물을 빼내어 사용했는데, 바로 이튿날 해병부대 군인들이 수색작전을 펴다가 10여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일월지를 건드린 벌이라 여겼고 그때부터 절대 일월지의 물에는 손대지 말라는 소문이 있다.

◆ 포스코는 왜 여기에 있을까

연오랑 세오녀 설화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고대의 해와 달은 제철신(製鐵神)을 상징했는데, 해는 철기 단야장(鍛冶匠)을, 달은 제철장(製鐵匠)을 상징했다고 한다. 해와 달을 합쳐 ‘명신(明神)’이라 했고, 명신당(明神堂)을 지어 제철 관련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에 연오랑은 단야장, 세오녀는 제철장이었다는 해석이다. 단야장과 제철장이 모두 일본으로 갔으니 제철공장에 불이 꺼졌다는 것이다.

‘고사기(古事記)’라는 일본 사기에는 스사노라는 신라의 신(神)이 일본 이즈모(出雲)로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를 연오랑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스사노는 이즈모 평야를 흐르던 하천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사철(砂鐵)을 캐어 농기구와 칼을 만든다. 즉 철의 나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종의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하천의 이름은 히이카와(斐伊川)로 본래 신라강(新羅江)이었다고 한다.

연오랑이 신라 4대 왕인 석탈해의 손자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 석, 김의 권력 쟁탈전 속에서 연오랑 왕자의 일본행은 무기의 재료가 되는 철을 찾아 나선 일종의 망명이었다는 것. 스사노가 사철을 캐어 칼을 만들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왕자비인 세오녀 역시 흑요석을 찾아 일본 규슈의 외딴 섬 히메지마(姬島)로 간다. 흑요석은 화살촉, 칼날, 도끼날 등으로 사용된 고대의 중요한 석재로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었다. 신라 제9대왕인 휴벌왕이 연오랑의 동생으로 석씨의 정권탈환에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공이 큰 셈이다.

일월동과 포스코 사이에 청림동이 있다. 청림동은 이름이 말하는 대로 노송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었고 형상강은 질 좋은 사철(砂鐵)이 많이 나는 하천이었다 한다. 고대 제철(製鐵)은 국가의 기밀이었고 제철에 꼭 필요한 것이 나무와 물이다. 풍부한 수목과 사철을 지닌 강, 거기다 깊고 은밀한 숲을 거느렸던 일월지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제철소로 완벽하지 않은가. 바람 같은 이야기와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기록들을 엮은 짐작이지만 단호하게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포항제철이 맨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은 데에는 경제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연원은 역사적이고 필연적일 수도 있겠다. 장소의 DNA라는 필연.

글·사진=류혜숙<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오랑세오녀전설의 유래(김창조, 신흥, 1929), 알타이계 시조신화연오랑세오녀(박시인, 예술논문집, 1966), 연오세오설화고(소재영, 1967), 연오랑세오녀전설의 한 연구(이관일, 1972)


☞여행정보= 포항IC에서 호미곶, 포항공항 방향 31번 국도로 간다. 공항 지나 동해면 소재지로 들어서면 왼쪽에 도구해수욕장, 오른쪽 면사무소 뒤편에 일월사당이 자리한다. 일월지는 오천읍에 있는 해병대 서문으로 가야 한다. 읍사무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서문이 있다. 입구 행정 안내실에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방문증을 받아 들어갈 수 있으며 부대는 주말과 휴일에만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까지(동계) 개방한다.

☞먹거리=해병대 서문 앞은 해병대의 거리. 식당이 즐비하다. 서문 자연산횟집의 물회와 초가밀면의 밀면, 일미분식의 된장찌개가 이름나있다. 이 거리에는 5일과 10일 큰 오일장이 열리며 다양한 먹거리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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