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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영화 ‘명량’ 그후 1년 사자명예훼손 무혐의 처분…‘배설은 여전히 억울하다’

2015-12-04

“배설 장군이 구한 12척의 전함이 아니었다면 이순신도 명량해전도 없었다”

20151204
지난 달 21일 성산배씨 종친들이 성주군 대가면 명천리 수름재에 위치한 배설 장군의 묘소를 찾아 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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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장군의 장남 등암 배상룡과 그의 아우 배상호를 배향한 재실 도남재.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에 있다.

지난달 30일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 심우정)는 배설 장군의 후손들이 영화 ‘명량’ 제작 관계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사자명예훼손 소송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했다. 이에 앞서 성산배씨 ‘명량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해 9월 “영화 속 배설 장군이 전투를 피하고자 거북선에 불을 지르고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는 등 네 장면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후손의 명예를 훼손했으며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수사를 의뢰했다. 검찰 관계자는 “영화 장면 중 일부는 사실이 아니고 역사적 평가에 따라 배 장군의 행동을 다르게 해석할 측면이 있다”면서 “그럼에도 영화라는 창작물의 특성상 명예훼손을 하려는 고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30일 개봉한 영화 ‘명량’(감독 김한민)은 1천700만 관객을 끌어모은 블록버스터 영화다. 하지만 배설 장군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악의적으로 묘사해 성산배씨 후손에게 소송을 당해 화제가 됐다. 영화 속 장면과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다를까.

배설, 이순신 암살계획 사실 아냐
거북선 불지르고 탈영 시도한 것도
역시 허구에 불과
“배설의 종이 경상도 敵 형세 보고”
난중일기 기록이 증명

종전후 모반 혐의로 처형당했지만
6년만에 임란 1등 공신으로 추서돼
“배설 장군의 업적은 송덕의 대상”
“배설은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다”

■ 영화 속 허구와 진실

새로 건조한 거북선이 불타는 영화 속의 장면은 허구다. 당시 거북선 등은 칠천량해전에서 다 소실됐다. 배설과 그의 부하가 이순신 암살 계획을 실행하다 실패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배설이 거북선을 불지르고 탈영을 시도하다 거룻배에서 거제현령 안위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나오는 것도 역시 허구다. 성산배씨 종친회 측은 배설과 이순신의 갈등을 희화화한 것으로 본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1597년 7월21일부터 9월2일까지 배설에 대해 집중적으로 좋지 않은 표현을 한다. 그러나 배설은 전함 12척을 구해 명량해전에 승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장수다.

배설은 칠천량에서의 패배로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름만 수사일 뿐 지휘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하지만 군사와 전함은 모두 경상우수영 소속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막냇동생 배즙에게 이순신을 도와주라고 한다. 그는 실제 병세가 중해 몸조리를 해야겠다고 이순신에게 병가를 신청했다. 8월30일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배설의 병가를 허락했다고 했지만 사흘 후인 9월2일 ‘도망갔다’고 썼다. 조정에선 10월11일 어전회의에서 배설 체포령을 내린다. 하지만 10월14일 난중일기엔 ‘배(배설)의 종이 경상도로부터 와서 적의 형세를 전했다’고 써 있다. 배설은 탈영하지 않았으며 경상도 일대에서 전쟁상황을 지켜본 셈이다. 몸이 아파 병가를 낸 장수가 졸지에 탈영병이 되고 조정의 체포령이 내려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 이전 8월17일자 난중일기엔 ‘배설이 약속한 배를 보내주지 않았다. 배설이 약속을 어기는 것이 매우 괘씸하다’고 나와 있다. 이때 배설과 이순신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순신이 경상우수영 소속 전함과 군사를 통제사 직속으로 조직개편을 하려 하자 배설은 반대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3도수군통제사, 경상수사, 전라수사, 충청수사가 각각 4분의 1로 나눠 거느리도록 한 편제였다. 이는 군권이 수군통제사 한명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처사였다. 이때 이순신은 ‘지금은 전시체제이고 도원수 권율과 상의했으니 어명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이후 선조의 외손자이자 문신인 신경은 ‘이순신이 배설을 속였다’고 기록했다. 신경에 따르면 그런 어명은 없었으며 이순신이 통제사로서 권력을 남용했다는 뜻이다.

그해 8월19일 수군통제사 즉위식이 열리던 날 임금의 교서에 숙배를 할 때 배설은 절을 하지 않았다. 수군통제사는 원래 종2품인데 선조가 이순신을 임명하면서 품계를 낮춰 정3품으로 했다. 이순신이 통제사였지만 배설 역시 정3품이므로 계급은 같았다. 그날 난중일기엔 ‘여러 장수들이 숙배를 하는데 배설은 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고 적었다.

임진왜란은 1598년 10월11일 노량해전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때 막냇동생 배즙은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다. 배설은 동생의 갑옷과 투구를 수습해 고향인 성주로 돌아온다.

이듬해 11월19일까지 13개월 동안 탈영병인 배설을 잡기 위한 시도나 명령은 없었다. 배설은 낙향해 지역 유림의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병조판서 홍여순은 배설을 모반죄로 추포해야한다고 아뢴다. 불손한 세력과 합심해 무뢰배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홍여순은 배설이 진주목사 재임시 경상우수사로 옮겨가도록 어명을 내렸건만 백성이 머물러주기를 바란다는 핑계로 두 달간 임지로 가지 않은 사실도 지적했다. 권율이 군사를 보내 배설을 체포한 뒤 한양으로 압송해 처형한다.

이때 그의 부친 배덕문과 아들 배상룡도 잡아들였으나 풀어준다. 경상감사 한준겸은 배설의 장례를 돕는다. 선비들은 배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성토했다. 선조와 조정은 후일 압록강까지 피신한 자들 위주로 임란공신을 발표했다가 민심의 역풍을 맞아 2차 공신 명단을 발표한다. 배설은 사후 6년 만에 임란 1등공신으로 추서됐다.

문학평론가 경북대 변학수 교수는 “‘성웅 이순신’ ‘명량’ 등 서사물을 통해 배설에 대한 폄훼와 왜곡이 도를 넘었다. 임진란과 정유란에 다른 장수는 어떻게 싸웠는지 모르고 오로지 이순신만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배설 장군의 업적은 송덕의 대상이지 소설적 허구의 대상은 아니라고 질타했다.

소설가 정만진은 “임진란이 끝난 뒤 선조와 대신은 적과 싸운 의병장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이순신, 원균, 김덕령 등은 전쟁 중에 권율 등은 종전 후 죽었으므로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배설이 아주 적절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종전 후 반역죄로 처형됐을 것이란 가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역사의 예술화엔 훨씬 엄중한 작가 정신이 필요하다. 배설 장군에 대한 허위사실을 날조해 소설과 영화를 만든 사태가 발생해 안타깝다. 그래서 누군가 역사를 위한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소설을 쓰게 됐다. 배설이 구한 전함 12척이 아니었다면 이순신도 명량도 없다”고 밝혔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 배설 장군 이해하기 두 가지 Tip

① 배설은 훌륭한 목민관이었다

1595년 배설이 경상도수사로 임명돼 임지로 가기 전 진주 목사를 역임했다. 당시 진주성은 왜군에게 패퇴해 진주백성은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그는 곡식창고를 열어 민심을 수습하고 조세를 감면해 달라고 조정에 청했다. 이 일로 진주백성은 임지로 가려는 그를 두 달간 붙잡았다. 후에 백성은 배설의 선정비를 세웠다. 경상도수사 시절 배설은 우수영에서 군졸과 같이 동고동락한 장수였다. 그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문신과 명나라 군대에 기대는 조정대신을 탄핵하고 문신이 아닌 무신이 도원수를 맡아 수성이 아닌 공성을 통해 자주적으로 전란을 끝내야 하며 수군의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는 문신 출신인 도원수 권율을 자극하는 계기가 돼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밀양부사로 좌천된다. 그가 수사에서 해직돼 우수영을 떠날 때 통제사였던 이순신은 난중일기(1595년 6월15일)에 ‘배설을 떠나보내니 마음이 불편하다’고 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배설의 관계는 좋았다.

② 배설은 휼륭한 전략가였다

이순신이 탄핵돼 백의종군할 때 배설은 경상우수사로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는다.

원균이 칠천량에 정박할 때 배설은 “칠천량은 바다가 얕아 크고 무거운 조선 판옥선이 움직이기에 불리하고 왜군이 육지를 점령한 상태라 이곳에 진을 치면 사방으로 포위돼 기습을 당할 우려가 있다”면서 정박을 반대했다. 그는 권율의 전쟁지시를 거부하고 한산도로 철수해 전열을 가다듬은 후 다시 싸우자고 했으나 원균에게 묵살당한다. 그날 밤 왜군의 습격을 받아 조선수군은 궤멸한다. 적의 포위진을 뚫고 배설이 전함 8척을 구하고 다시 김억추 등과 4척의 전함을 수습한다.


■ 배설 장군과 그 집안

부친 서암 배덕문, 동생 배건·배즙, 장남 상룡까지 3대가 참전…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에 후손이 누대에 걸쳐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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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에 뒷개마을 초입에 있는 숭조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배덕문과 그의 아들 배설·배건·배즙과 배설의 아들 배상룡·배상호를 기리는 유허비다.



배설 장군(1551~1599)은 임진왜란 당시 3대가 의병을 했다. 부친인 서암 배덕문(1521~1603)은 명종 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한성서윤, 언양·영덕·울산·고부군수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동향인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과 교유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68세의 노구로 창의해 의병제독이 돼 성주성을 탈환하는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후에 선무원종3등공신에 책록됐다. 덕문의 차남 배건은 부친을 따라 종군하다 금산 여남현 전투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전사했다. 3남 배즙은 별시무과에 급제한 뒤 개산진 전투에 부친, 형들과 종군해 선무사가 됐으며 노량해전 때 이순신과 함께 전사했다. 선무원종2등공신에 녹훈되고 병조참판으로 추증됐다.

배설은 서암공의 장남이다. 선조 16년 별시 무과에 급제한 뒤 임란이 일어나자 초유사 김성일의 가장으로 전공을 세웠다. 부친과 함께 성주성 전투에 참전해 적장 구로다 구싱의 목을 베고 개산진에서는 적장 소 요시토시를 격파했다. 합천군수, 부산첨사, 동래부사를 하다 진주목사에 제수됐다. 진주목사 재임시 선정을 펴 거사비가 세워졌다. 이듬해 경상도수사 겸 부원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진주백성의 만류로 두달간 임지에 가지 못했다. 경상도수사 재임시 조정 대신의 무능과 병영비리에 대한 장계를 올리다 권율 등에 탄핵을 받아 밀양부사·선산부사로 좌천됐다. 선산부사 때 금오산성과 천생산성을 축성하고 금오산별장을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로 배수돼 통제사 원균의 지휘 아래 다대포, 부산포전투에 참전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과 이억기 등이 전사하는 등 조선수군이 전멸하는 위기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전선 8척과 수군 1천여명을 구출해 한산섬으로 와 청야작전을 실행하고 백성들을 대피시켰다. 이어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함께 전함 4척을 더 수습해 왜군의 서해진출을 막았다. 당시 이순신은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을 때 12척의 전함과 장졸을 이순신에게 넘겼다. 1597년 8월30일 병을 얻어 휴가를 냈다. 9월2일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배설이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그는 경상우수영 관할지역에서 직책이 없는 상태로 종군했다. 임란 종전 후 병조판서 홍여순에 의해 모반죄로 탄핵을 받아 1599년 처형됐다. 선조실록에는 ‘한산패전(칠천량)’의 책임을 물었다고 했으나 전쟁 후 민심수습을 위한 희생양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 예로 광해군이 즉위한 뒤 홍여순은 진도에 유배돼 사사된다. 배설은 사후 6년이 지나 선무원종1등공신을 받고 호조참판(광해 2), 병조판서(고종 10)에 증직됐다. 배설은 네 아들을 뒀다. 그 가운데 장남 상룡은 성주성전투, 화왕산전투 등에 참전했으며 한강 정구의 수제자로 학문이 높았다.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후포(뒷개)는 서암 배덕문의 후손이 누대에 걸쳐 살고 있는 마을이다. 33번 국도를 가다 농협 대천지소 삼거리에서 도남리로 가면 된다. 뒷개마을 초입에 배덕문·배설·배건·배즙·배상룡·배상호 선생 등 서암공파 6조의 유업을 기린 숭조대가 있다. 마을엔 등암 상룡과 그의 아우 괴재 상호를 배향한 도남재, 등암 영각이 위치한다. 뒷개마을에서 약 4㎞ 근방 성주군 대가면 명천리 수름재에 배설 장군의 묘소가 있으며 성주군 대가면 옥화2리에 서암공의 묘역이 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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