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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2016-02-05

철길 나던 날 낙동강과 생이별…엉뚱한 옆동네이름 붙은 國寶

20160205
기찻길 옆 전탑. 일제시대 중앙선 철로가 놓이면서 주변 대지를 잃고 시선은 가로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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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신세동 7층 전탑.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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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탑 기단의 신장상. 일제강점기에 보수하면서 위치와 순서가 뒤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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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동 칠층 전탑 바로 뒤에 위치한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중요민속자료 제185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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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임청각.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보물 제182호다.

굴다리 통과해 크고 웅장한 탑 앞
지붕에는 기와가 드문드문…
철길 높은 벽에 갇혀 서러운 모습

옛 법흥사 터 탑동파 종택에 서면
옛사람이 노래한 황홀한 풍광 대신
철길·찻길, 그너머 낙동강 어지러이

서쪽 기와집은 석주 生家인 임청각

철길 굴다리 속으로, 철길의 가림벽 사이로, 탑은 얼핏 보인다. 천 년도 더 되었다는 나무의 그루터기 같기도 하고, 북방의 사나운 이에게 해를 당했다는 석상의 토르소 같기도 하다. 그래서 차칸에 앉아 어쩌다 스쳐 본 이는 자꾸만 갸우뚱할 것이지만, 오래 이 길을 달린 기관사는 옛 집의 구대장군을 맞이하듯 100m 전부터 곡진한 눈길을 줄지도 모른다.

◆ 기찻길 옆 7층 전탑

두 해도 더 넘게 갸우뚱하다 내처 달려간다. 더러는 잊었으나 결국 당도했으니 갸웃한 맘이 조금은 더 셌던 셈이다. 굴다리를 통과해 탑 앞에 선다. 강과 산 사이 좁다란 땅, 도로와 철도가 비집고 들어와 더욱 좁장해진 땅, 거기 절반의 양지에 탑은 서있다. 크고, 웅장하다. 그러나 철길의 높은 벽에 갇혀 쓸쓸하고 서러운 모습이다. 중앙선 철길이 놓인 것은 일제시대. 탑은 늘 눈앞에 있던 낙동강과 생이별을 했으니 저 벽은 부러 높였으리란 의혹을 지울 맘 없다.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는 거의 없지만 기단부의 신장상을 통해 8세기 중엽을 상한 연대로 본다. 신장상은 원래부터 기단부에 있던 것은 아니라 한다. 기단부는 철로 공사 때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때 신장을 새긴 판돌들의 위치가 변했고 그 위쪽은 시멘트로 보수되었다고 전한다. 지붕에는 기와가 드문드문 남아 있다. 옛날에는 눈비로부터 탑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처럼 섬세히 기와를 얹었을 것이다. 탑머리에는 화려한 금동 장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투구를 잃은 장군의 모습이다.

탑과 한 걸음 사이에 두고 긴 담으로 둘러싸인 기와집이 있다. 숙종 30년인 1704년 좌승지 이후식이 지었다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다. 탑 뒤 산자락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앉은 마을로 올라가 본다. 발돋움해도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는데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 사각의 연못까지 한눈에 보인다. 사랑채에서 연못 너머 탑을 내다보는 풍취가 지금도 제법 은근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안동 지역의 향토 문화를 기록한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이곳에는 법흥사라는 절이 있었다 한다. 동네 이름도 법흥동이다. 박효수라는 옛 사람은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다.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 들비는 빛이 먹처럼 짙어서 모든 자취를 검게 덮어버리고, 호수에 날이 개니 가늘게 밝은 자태를 희롱한다. 먼 마을의 단풍 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 높은 산 차운 소나무에는 가을안개 물러간다”고 노래했다.

탑동파 종택이 들어선 땅은 법흥사 절터의 일부였을 것이다. 옛 사람이 노래했던 황홀한 풍광은 찾을 수 없지만 탑과, 철길과, 자동찻길과, 그 너머 낙동강이 어지러이 보여 공중에 있는 것 같다. 탑의 이름은 신세동 7층 전탑이다. 1962년 이 탑을 국보 제16호로 지정할 적에 옆 동네의 이름을 잘못 붙여서 그리된 것이라 한다. 한 나라의 국보를 대하는 일이 그리 허술하다니. 굴뚝도 잘못 고치면 구대장군이 노할까 정성을 다하고, 이름 바꾸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도 않은 세상 아닌가.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부르르 떨리는 탑의 쇠약한 노기를 본다.

◆ 법흥사 터 독립운동가의 집, 임청각

탑의 서쪽, 법흥사의 금당 자리에 으리으리한 기와집이 있다.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옛집 임청각(臨淸閣)이다. 조선 중종 때인 1519년, 형조좌랑을 지낸 고성이씨 이명이 99칸으로 지은 집이다. 이 집 역시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있다.

건물들은 좁은 대지 위에 가로로 길게 들어서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다만 13칸이나 되는 긴 바깥 행랑채가 이 집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 뒤로 높은 기단 위에 앉은 아담한 사랑채 군자정(君子亭)이 한눈에 보인다. 군자정 내부에는 퇴계 이황이 쓴 ‘임청각’ 현판과 이곳에 머물다 간 묵객들의 시, 그리고 3대에 걸친 독립 운동가의 사진이 걸려 있다.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선생은 한일합방이 되자 노비를 풀어주고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은 뒤 만주로 향했다. 그리고 1932년 중국 지린(吉林)에서 사망할 때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선생의 집념은 동생, 아들, 손자, 조카 등 3대 9명에 이르는 독립 운동가를 낳았다. 선생의 유해는 1990년에야 조국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말 임청각의 매매계약서가 발견됐다. 항일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석주 선생이 자신의 생가를 팔았다는 오래된 소문이 입증된 것이었다. 고성이씨 문중에서는 당시 집을 되찾기 위해 모금활동을 폈고 2개월여 후 집안의 다른 파(派) 주손 4명 앞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안동 사람들은 일제가 일부러 탑을 막고 고택을 잘라 철길을 냈다고 믿는다.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지도만 펴 봐도 철길이 에둘러 가는 모양새는 분명 의도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찻길에 눈 가려지고 달리는 기차에 흔들거려도, 탑은 척추 세워 서 있고 임청각 팔작지붕은 날아오를 듯 기상 높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길잡이

남안동 IC로 나가 안동역 방향으로 간다. 역 앞에서 진보, 영양 방향 34번 국도로 약 1㎞ 가다 법흥육거리에서 왼쪽 안동댐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가면 중앙선 굴다리가 나온다. 임청각과 전탑 사이에 주차공간이 있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도 좋다. 안동역 앞에서 안동댐행 3번 시내버스를 타면 신세동 7층 전탑 입구에서 내린다.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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