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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8] 장원방 명문가 진양하씨(晉陽河氏) 집안의 하담(河澹)과 그의 장인 유면(兪勉)

2016-07-28

하담=[문과] 태종 2년(1402)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
유면=[문과] 태종 5년(1405)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
장인은 장원, 사위는 부장원…한 집안서 다섯명이나 과거급제

20160728
하담이 지청송군사 재임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지은 찬경루. 청송심씨의 시조 심홍부의 제를 지내기 위해 지은 제각으로 1428년 건립했다. 찬경루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청송군의 객사 운봉관이다. 운봉관 역시 하담이 지청송군사로 있으면서 찬경루와 함께 건립했다. <영남일보 DB>

한 마을에서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옛 선산 영봉리,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의 최고 명문가는 진양하씨(晉陽河氏) 집안이다. 하담(河澹)을 비롯해 그의 아들 4형제 중 하강지(河綱地), 하위지(河緯地), 하기지(河紀地)가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막내 하소지(河紹地)도 생원시까지 합격했다. 여기에 하담의 장인 유면(兪勉) 역시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로 급제자 명단에 올랐다. 진양하씨 집안은 처가를 합쳐 한 집안에서 5명(하담, 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유면)의 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하담은 조상 대대로 지금의 경남 진주에 살다가, 선산 영봉리(장원방)에 살던 장인 유면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 장원방에 정착했다. 1402년(태종 2) 식년시에서 을과 2위로 부장원을 차지했고, 벼슬길에 올라서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 특히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 청송군수)로 부임해 많은 업적을 쌓았다. 당시 세종의 명을 받아 청송의 찬경루와 운봉관, 만세루 등을 지은 것이 대표적이다. 하담의 장인 유면은 인동유씨(仁同兪氏)로 인동현(지금의 구미 인동)에 세거하다가, 선산 영봉리로 이사와 정착했다. 유면은 사위 하담보다 3년 늦게 과거에 급제했다. 1405년(태종 5) 식년시에서 을과 1위로 장원급제한 후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흥해군수로 재직하다 병사했다. 사헌부지평 시절에는 서슬퍼런 태종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은 강직한 관료였으며, 당시의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20160728
1402년(태종2) 식년시에서 을과 2위로 부장원을 차지한 하담의 급제 기록.

영봉리에 장가 든 하담
세종 신임 얻어 지청송군사 부임
소헌왕후 향한 왕의 깊은 뜻 담아
찬경루·만세루·운봉관 건립 힘써
세 아들도 급제…대표적 명문家

#1. 진주 선비 하담, 선산 영봉리로 장가들다

남귀여가(男歸女家)라 하여, 남자가 여자 집에서 혼례를 거행하고 그대로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고 나서야 본가로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이는 진주사람 하담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진주의 토성(土姓)이자 명문으로 유명했던 진양하씨 가문의 어른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 하지백(河之伯)이, 아들 하담을 선산 영봉리의 유면(兪勉) 집안에 장가 ‘보낸’ 것이다. 그렇게 하담은 자연스럽게 영봉리 사람이 되었다.

영봉리에서의 삶은 대체로 순탄했다. 장인 유면의 그릇이 커서 정서에 안정을 얻었고, 길재(吉再)의 문인이었던 김숙자(金叔滋)와 이웃이 됨으로써 학문에도 덕을 보았다. 게다가 아들 4형제(하강지, 하위지, 하기지, 하소지)도 어찌나 총명한지 바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본인의 몫만 남은 상태에서 하담은 공부에 진력을 다했다. 그것만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1402년(태종2) 4월3일, 식년시(式年試) 임오2년방(壬午二年榜)이 치러졌다. 시험 총감독이라 할 수 있는 지공거(知貢擧)로는 참찬(參贊·정2품) 권근(權近)이, 부감독이라 할 수 있는 동지공거(同知貢擧)로는 참의(參議·정3품) 이첨(李詹)이 나왔다. 좌사간(左司諫·정3품) 김이음(金邇音), 좌사윤(左司尹·정3품) 공부(孔俯), 직제학(直提學·정3품) 방사량(方士良), 예조의랑(禮曹議郞·정4품) 장자숭(張子嵩), 장령(掌令·정4품) 현맹인(玄孟仁) 등도 시험관으로 등장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고려 때 문과에 합격한 이들이었는데, 특히 권근과 이첨은 문장이 뛰어나기로 명성이 자자한 터였다. 하담은 긴장했지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결국 부장원(副壯元·2등)에 이름을 올렸다. 선산 영봉리의 큰 경사였다.

#2. 세종의 명을 받던 지청송군사

과거급제 후 25년 동안 여러 관직을 두루두루 거쳤던 하담에게 1427년(세종 9) 2월, 지청송군사(知靑松郡事, 청송군수)의 직이 맡겨졌다. 청송은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본향이어서 세종이 평소 관심을 크게 두고 있던 지역이었다. 아무나 보낼 수 없어, 천성이 충실하고 효심이 지극하며 절개가 굳기로 이름난 하담을 택한 것이었다. 세종은 친히 하담을 불러 당부했다.

“수령은 나가서 백리(里)나 되는 고을을 다스리니 그 소임이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 내가 친히 보고 명하여 보내는 것 또한 그런 연유이다. 마음을 다하여 나의 지극한 심정을 본받을 것이다.”

세종은 또 백성을 살피는 일 외에 청송에서 해야 할 일들을 조목조목 일러주었다. 소헌왕후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던 세종이 아내의 본향에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연유는 이러했다.

청송심씨 집안 딸(소헌왕후)이 왕비가 되면서, 심씨 가문의 권세는 가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외척을 경계한 상왕 태종에 의해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사약을 받아 죽고 어머니는 천인으로 내려앉는 등 순식간에 풍비박산했다. 졸지에 죄인의 여식이 되었으니 소헌왕후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8남2녀를 생산해 국본을 튼튼히 하고 왕실을 번창케 한 데다 큰 덕으로써 세종을 보필했다’고 시아버지 태종이 감싸안으면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 그에 대한 남편 세종의 배려는 늘 아낌이 없었다.

하담은 청송에 부임한 이듬해인 1428년, 세종의 명을 성실히 이루었다. 특히 찬경루(讚慶樓)와 만세루(萬歲樓), 운봉관(雲鳳館)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찬경루는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沈洪浮)의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제각(祭閣)으로, 소헌왕후 심씨를 향한 세종의 깊은 뜻이 담겨있었다. 청송심씨 시조묘는 찬경루 맞은편 보광산에 위치해 있다. 당시 묘소로 가려면 청송을 가로지르는 용전천을 반드시 건너야 했다. 하지만 장마철이 되면 강물이 자주 범람했고, 이 때문에 묘소로 갈 수 없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연유로 세종은 하담에게 명을 내려 시조묘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지금의 찬경루를 짓게 했다. 이후 장마철에 시조묘에 갈 수 없을 때는 이곳에서 제를 올릴 수 있었다. 아내 소헌왕후의 본향에 대한 세종의 세심한 배려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찬경루라는 이름은 관찰사 홍여방이 ‘누각에서 보광산에 있는 소헌왕후의 시조묘를 바라보며 우러러 찬미한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아울러 사계절 전사(奠祀·시제) 때, 용전천이 조금이라도 불어 관원과 후손들이 건너는 데 애를 먹을까봐 소나무 가지를 엮어 섶다리를 놓기도 했다. 섶다리 역시 하담이 지청송군사 시절 설치했다. 이 섶다리를 건너서 보광산에 들어서면 시조묘 원당사찰(願堂寺刹)인 보광사(普光寺)가 나온다. 보광사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또 하나의 제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이 만세루다. 만세루 역시 비가 내려도 이곳에서 차질없이 제를 지내기 위해 지었다.

운봉관 역시 하담이 지청송군사로 재직할 때인 1428년, 찬경루와 함께 지은 청송군의 객사(客舍)다. 객사는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들이 묵는 공공숙박시설 기능도 있었지만, 이곳에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놓고 예를 올리기도 했다. 임금을 모신 곳이어서 고을에서 가장 권위있는 건물이었다. 이런 객사가 산골짜기 청송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은 당시 나라에서 차지하는 청송의 지위가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담이 지은 찬경루와 운봉관은 현재 청송군청 앞에 자리한 소헌공원에서 볼 수 있다. 용전천 섶다리도 청송군이 15년여 전에 복원해 매년 10월초에 놓았다가 이듬해 우수기 전에 철거한다. 세종의 명을 성실히 이행한 하담은 지청송군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1429년 6월 청송을 떠났다.

20160728
1405년(태종5) 식년시에서 을과 1위로 장원급제한 유면의 급제 기록.

하담의 장인 유면
‘농사직설’정초 누르고 장원급제
소신있고 강직한 성품 인정받아
사헌부지평·지흥해군사 등 역임
서슬퍼런 태종에 직언 일화 유명

#3. 뒤늦은 과거, 장원급제한 장인 유면

하담의 장인 유면(兪勉)은 인동유씨로 인동현(선산·인동·구미가 통합된 지금의 구미)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대로 살던 인동을 떠나 이웃 마을 선산 영봉리(장원방)로 이사해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과거급제는 다소 늦었다. 사위 하담이 급제하고 나서도 3년이나 더 지나서야 식년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1405년(태종 5) 4월21일은 을유오년방(乙酉五年榜)의 날이었다. 시험관으로는 이숙번(李叔蕃)이 지공거(知貢擧)로, 유창(劉敞)이 동지공거(同知貢擧)로 나왔다. 다소 늦은 급제에 대한 한풀이었는지, 유면은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했다. 사위에 이어 영봉리의 또한번의 경사였다. 당시 부장원(副壯元·2등)은 훗날 세종 조에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정초(鄭招·영남일보 7월21일자 13면 보도)로, 그 역시 영봉리가 배출한 인재였다. 유면과 정초 두 사람은 출사 이후 내내 문장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장원으로 급제한 유면은 바로 장흥고부사(長興庫副使·종6품)에 제수됐다. 장흥고는 석자(席子·돗자리), 유둔(油芚·비올 때 쓰는 두꺼운 기름종이) 등을 관장하던 관서였다. 이후 유면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성품 덕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정5품)으로 임명됐다.

#4.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사헌부지평

1409년(태종 9) 5월30일, 상소를 열어본 태종이 당황했다. 사헌부지평 유면의 표현이 실로 적나라했던 것이다.

“저런 대신을 대체 무엇에 쓰겠습니까.”

여기서 유면이 지적한 ‘저런 대신’은 우정승(右政丞·우의정·정1품) 이무(李茂),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이천우(李天祐), 좌대언(左代言·정3품) 이조(李) 등 세 당상관과 태종의 고모인 정화공주(靖和公主)의 장남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겨냥하고 있었으니 내막은 이러했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원경왕후의 동생이자 태종의 처남으로 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운 공신이었다. 하지만 유면이 상소를 올린 당시는 세자(양녕대군)를 이용해 권력을 잡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이태 전부터 유배지를 떠도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지성(李之誠)이라는 자가 세자를 호위해 명나라에 다녀오는 길에 세자에게 은밀히 이르기를, 민씨 형제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지성이 위의 대신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유면에 의하면 “그런 간신을 천거한 것도 모자라 잘못을 보고도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포장해서 상까지 내린” 정황이었다.

상소의 내용은 ‘다 용서할 수 없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태종의 속마음은 처남들의 목숨만은 보장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험한 시간을 함께해온 동지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를 청하는 상소에도 끝내 태종이 들어주려 하지 않자 유면을 포함한 사헌부에서는 열흘 뒤인 6월9일에 다시 처분을 독촉했다. 이어 6월11일에는 아예 대놓고 민씨 형제의 머리를 끊어버릴 것을 상소했다. 태종의 성정이 제아무리 사납다고 해도, 후일 세자가 보위를 이었을 때 민씨 형제들이 득세할 것을 생각하면 뿌리를 뽑아야 했던 것이다.

“이 두 사람(민무구·민무질)이 사는 것이 무엇이 전하에게 보탬이 되며, 그 죽는 것이 무엇이 손해가 되겠습니까.”

날선 직언에도 태종은 계속해서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유면은 아예 사직을 고하고 집에 돌아가 버렸다. 다행히 태종은 그런 유면을 탓하지 않고 한 달 뒤에 다시 복직시켰다. 하지만 유면의 신병은 날이 갈수록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15년 후인 1419년(세종 1) 2월, 지흥해군사(知興海郡事·흥해군수)의 업무를 수행하던 중 병사(病死)하고야 말았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의 맥락,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청송군지, 조선왕조실록

공동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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