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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타워] ‘왕자는 필요없다’

2016-08-11
[영남타워] ‘왕자는 필요없다’

회사에서 실시하는 직장 내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남자만 받으면 되지 여자도 받아야 하나, 알아야 대처를 하지, 의무교육이라니 별 수 있나,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교육장엘 갔었다. 무슨 여성관련 단체에서 나왔다는 강사는 2시간 내내 열심히 OX 퀴즈를 냈다.

‘내가 원하지 않은 내 외모에 대한 평가는 성폭력이다’ ‘성폭력 여부의 판단 기준은 가해자의 의도 혹은 고의성 여부이다’ ‘같이 웃고 즐겼던 상대가 나중에 수치심을 느꼈다면 성폭력이다.’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강의 내내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던 기억이 난다. 정답만큼 궁금했던 것은 이런 매뉴얼식 교육이 성폭력 예방에 효과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이었다.

성폭력을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난 행동으로만 접근하는 이같은 방식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성욕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생리적 현상이지만, 추행이나 희롱과 같은 성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폭력과 권력에서 비롯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의 뿌리는 성욕이 아닌 폭력성이고, 단지 그 폭력성이 성을 매개로 발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은 성폭력이 권력과 인권의 문제라는 인식이다. 아무리 OX를 많이 맞힌다 한들 그 배경이 되는 성감수성, 인권감수성이 없다면 언제 어디서 OX의 정답에 반하는 행동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남성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성기의 구조와 이름과 기능을 성교육이라고 받으면서 몰래 본 야동 따위를 통해 성적 대상으로서의 이성을 학습해 온 것이 현실이다. 설상가상 학교와 군대, 사회를 통해 학습하는 남성성이란 것도 일종의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권력 관계의 내면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서열 관계를 통한 권력 행사는 이들에게는 편의적인 동시에 옳다.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만만한 대상을 골라 까짓 권력을 거리낌없이 행사할 수 있는 배경이다. 그렇게 일상의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단톡방에서 여학생을 놓고 음란한 문자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리고 신입생 후배를 돌아가며 성폭행하는 이들에게 죄의식이란 없다. 바람직한 남녀 관계에 대한 인식,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올바른 태도, 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가치관 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이들이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고 직장에 들어가니, 술을 따르라거나 몸을 만지는 등의 성폭력이 계속될 수밖에. 정작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공소시효가 끝난 걸 무혐의라고 우겨대며 ‘영혼의 상처’ ‘인격 살인’ 운운하며 뻔뻔스러운 입을 반성없이 놀리는 것쯤은 그래서 놀랍게도 놀랍지 않다.

더욱 나쁜 것은 우리사회가 성폭행을 피해 여성의 ‘잘못된’ 처신이 불러일으킨 남성의 억제하지 ‘못하는’ 본능으로 인한 ‘우발적’ 행동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 명확한 인과관계 속에서 따지고 들면 원인은 늘 여성에게 있다. 피해자의 경솔한 행동을 탓해 피해자로서의 자격을 의심하게 만드는 주객전도식 프레임은 사회적 성찰의 계기를 박탈해버린다는 점에서 아주 불온하다. 성범죄를 없애기 위해 미니스커트를 금지하고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회는 퇴화한다.

도서지역에 여교사를 발령내지 않아도, 남녀 공용 화장실을 모두 없애도, 지하철에 여성칸을 만들고 등산하는 여성들에게 안심팔찌를 채운다해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폭력인 줄 모르고 죄의식 없이 행사하는 불감증의 사회에서는 비슷한 사건·사고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기껏 ‘티셔츠 한 장’에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들고 일어나는 이들이 지금껏 ‘정상적인’ ‘당연한’ ‘원래 그런’ 것으로 인식해 온 현실에 그 답이 있다. 이은경 주말섹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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