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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김홍도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2016-10-21

구르미 그린 달, 은은한 빛으로 잡목을 감싸 안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김홍도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김홍도,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에 채색, 26.7X31.6㎝, 호암미술관 소장.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김홍도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

지진에 이어 폭풍이 왔다. TV에는 ‘송중기’에 이어 ‘박보검’이 왔다. 종영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왕세자 이영(박보검 분)과 남장 여자인 내시 홍라온(김유정 분)의 깨알 같은 사랑 이야기이다. 세자의 촉촉한 눈빛과 달콤한 음성, 새하얀 미소는 안방을 녹였다. 그 속에 ‘여심’이 푹 빠졌다.

이 드라마에서 배우가 눈을 호강시켜줬다면, 정작 마음을 훔쳐간 것은 달이다. 잘생긴 미남·미녀가 주연이라면, 달은 ‘신스틸러’였다. 달은 수시로 등장해서 눈물샘을 자극했다. 주인공은 달을 바라보며, “궁궐에 있든 반촌에 있든 달은 그저 달일 뿐”이라고 말한다. 달은 함께 보면 기쁘지만 혼자 보면 슬퍼진다. 달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골고루 평등하게 비추지만 어떻게 느끼느냐는 신분에 따라 다르다.

달의 정취를 아련하게 표현한 작품 중 단원 김홍도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가 있다. 앙상한 잡목들 사이로 뜬 보름달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구르미 그린 달’, 즉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나게 하는 기법(烘雲托月)으로 그린 달은 세상사를 초월한 듯 무심한 표정이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여 눈을 부비며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달은 바라만 보아도 넉넉하다. 신비로운 모습은 상상력에 불을 지펴 신화를 낳았다. 달은 우주가 지구인에게 선사한 위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저 얻어지는 선물은 없다. 선물은 대가가 따르기에 더 값진 법이다. 밝음 뒤에 어둠이 따르듯이, 나에게 달은 아픔과 함께 떠오른다.

몇 해 전이었다. 엄마가 육신을 벗고 하늘나라로 갈 채비를 할 때였다. 1월 새벽 서럽도록 차가운 날, 119구급차에 실려 가는 엄마를 앞세우고, 나는 차를 몰고 따라갔다. 차마 마음이 떨려 구급차를 탈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달이 엄청나게 컸다. 검푸른 하늘에 걸린 노란 달이 대지를 집어삼킬 태세였다. 해가 지는 것은 보았지만 달이 지는 것은 처음이다.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달은 처음 보았다. 새벽 5시의 겨울은 깊고 적막했다. 그해 꽃 피는 3월, 엄마는 떠났다. 그 후 엄마가 달이 되어 나를 내려다볼 것이라고 믿었다.

김홍도는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림신선(畵仙)’이라 불렸다. 정조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그림 재주는 탁월했다. 그는 그림으로 정조의 눈과 귀가 되었다. 우리에겐 풍속화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화조화, 고사인물화, 신선도, 초상화는 물론 불화, 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또한 조선의 산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와 우리 조상의 멋과 흥, 해학을 이끌어낸 풍속화 등에서 한국적인 미를 발현시킨 천재였다.

‘소림명월도’는 평범한 자연을 소재로 해서 도달한 경이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눈에 띌 만큼 색채가 화려하지도 않다. 어여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잡목 몇 그루가 어깨동무를 하듯 자유롭게 서 있다. 그 뒤에 둥근 달이 뚫어져라 화면 중앙을 보고 있다. 그야말로 심심하고 소박하다. 그것은 중년의 화력(畵力)이 빚어낸 결과다. 먹의 농도로 나무의 거리를 조절하고 여백으로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 냈다. 보고 또 봐도 정취가 새롭다.

김홍도는 51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순수화가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제작된 대다수 작품에는 문학적 감수성이 내장되어 있다. 여백의 절묘함과 먹색의 간결함을 구사하여 작품성을 강조했다. 작품에 표현된 분방한 필치는 김홍도의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을 드러낸다. 주로 남종문인화의 그윽한 서정성이 어우러진 그림들이다. 화가는 자유로울 때, 예술성이 깊어진다.

내가 ‘소림명월도’를 본 것은 1995년 12월 추운 겨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탄신 250주년 기념 단원 김홍도 특별전’에서 잡목이 듬성듬성 서 있는 야산의 서치라이트 조명 같은 둥근 달을 만났다. 김홍도의 수많은 걸작에 눈이 쏠려, 이 작품은 안중에도 없었다. 풋풋한 시절, 당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화첩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작품들이었다. 이 작품이 가슴에 들어온 것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대단할 것 없는 ‘명월’이 좋아졌다. 명작은 긴 세월을 두고 진가를 발휘한다. 사람도 그렇다. 무엇이든 세월의 연륜이 쌓여야 은은하게 빛난다.

달은 사람을 명상에 잠기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달빛은 왕세자 옆에 있었다. 여인 홍내관이 바로 그 사랑의 달빛이다. 정조의 지척에는 김홍도의 그림이 있어서, 정사(政事)를 밝혀주었다. ‘소림명월도’에서 ‘구르미 그린 달’은 보잘것없는 잡목을 달빛으로 감싸 안는다. 달을 가리는 것은 사람일 뿐, 달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달은 오늘도 나의 엄마가 되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어 마음의 하늘을 밝게 비춘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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